어, 저기 티브이에 나온 사람, 너 아니야?
대학생활부터 지금까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다. 내가 사회를 바꿀 수는 없어도 문제를 인지 시키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게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100만 국민이 염원하며 탄핵을 위해 광화문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때. 말로만 정치 시민이 바로 나였다.
반면, 나와 같은 과 친구는 16년 10월 29일, 첫 집회부터 매주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갈 때마다 현장감 있는 광장의 분위기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상세히 알려줬다. 티비로 보기에 과격하기보다 오히려 평화로워 보이는 그곳. 그녀는 수 만 명의 사람이 촛불을 들고 있어 그런지 하나도 춥지 않았다고 전했다.
무려 세 번이 지났는데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의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인파에 다치진 않을까 염려하는 그로 인해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평상시에 지하철 탈 때도 사람이 많으면 휩쓸려 다니는 나를 상상하니 도저히 못할 짓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다른 이유 중 하나였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손가락 하나가 없어도 제대로 생활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역할은 의외로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무서웠다. 나의 생존권과 직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 후, 3개월의 수습기간이 지나 정규직 된 지 고작 3개월밖에 되지 않은 때는 늦가을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외부에서는 그렇게 떠들어대던 ‘탄핵’에 대한 이야기와 우리들의 깊은 분노가 회사에선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점심시간에 얘기가 나와도 얼굴을 찌푸리는 그들 앞에서 침묵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마음속으로 자꾸 자문했다. 생존이 중요한 건가 아니면 내 삶의 가치를 다시 돌아봐야 하는 걸까.
침묵은 과연 행동과 직결됐다. 말문이 턱 막혀버리자 내 움직임도 둔해졌다.
촛불집회가 한 달이 지날 때쯤 뉴스를 보던 가족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함께 촛불집회에 가자며 권유하는 엄마에게 우리 세 식구는 약속이 있음을 알렸다. 다음번에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완고했던 엄마는 세 번째 그날 광화문으로 향했다.
엄마는 혼자 그 먼 길을 떠났다. 100만 명 이상 모인 그 광장에서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전화했다. 열 번을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같이 있던 남자 친구를 붙잡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데이트가 있단 핑계로 엄마를 혼자 사지로 몰아넣은 못된 딸 같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에 한동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다녀온 친구들은 영웅담인 것 마냥 촛불의 형연을 묘사했다. 다녀오지 않은 난 그들 앞에서 또다시 너무나 시끄러운 고독을 이어갔다.
철학을 공부하며 도덕적인 것과 정의로운 것에 대해 민감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예민하게 굴었다. 뭔가 주변 지인이 올바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면 행동을 멈춰야 할 타당한 이유를 드는데 능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나서기보다 뒤에서 힐끔힐끔 눈치만 보며 잘못한 것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자 했다. 아니 그저 눈 감고 귀를 막았다. 그렇게 부당한 상황에 대해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사람이 돼 버렸다.
결국 최대 인원이 집결했다며 보도된 그날이 돼서야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다.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하고 그렇게 백만 명 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혹시 넘어져서 밟히진 않을까 잠깐 동안 두렵기도 했지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결의 넘치는 표정은 내게 무언의 용기를 줬다.
질서 있게 지하철로 들어와 집으로 내려가던 그때, 주말 저녁에는 좀처럼 울리지 않던 메신저 창이 몇 차례 알람을 보냈다. 보기 싫어서 잠금 상태로 해 두고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친구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거 봐봐” 하며 내 핸드폰 잠금장치를 풀었다.
“촛불 집회 가셨나 봐요?"
앉을자리가 없어 서서 촛불을 들고 집회를 지속하던 중 대각선에 한 매체사 방송용 카메라가 서 있는 걸 확인했다. '설마 내 얼굴이 찍히겠어.' 의식하지 않고 집회 행사에 참여하다 두려운 마음에 장갑 낀 촛불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 장면이 떡하니 텔레비전에 나왔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인가. 게다가 잠깐 지나치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풀샷으로 두면서 왜 기자가 멘트를 쳤던 걸까.
그 사실을 회사에서 제일 싫어하던 직장 상사가 발견했다. '가서 뭐 했어요? 아주 대단하네~'라는 비꼬는 듯한 말투에 얼굴이 새빨개지고 당황한 내가 이걸 두려워했구나 생각했다. 그의 한 마디는 큰 파장을 불러왔다. 주말 동안 걱정으로 잠을 못 이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그만두라고 하면 어떡하지. 정치적 성향이 확실하니까 그럴 수도 있어.
보수적인 집단이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야."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늘 '행동'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솔선수범이라는 말의 뜻을 잊고 살았다. 오랜만에 엄마 덕분에 행동해서 본보기가 된다는 모습을 확인했다. 나부터 표현하는 사람이었고, 옳지 못한 일에는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성적에 맞춰서 윤리교육과에 진학했다는 생각을 하고 살다가 요즘 들어 '나에게 적절한 학과'였을 거라는 판단이 든다. 우리 삶에는 참 다양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며 살까?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려 드는 습성을 없애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래전 엄마와 대입 정시 논술을 준비하며 했던 질문이 기억난다.
-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가?
-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은 누구인가?
지금까지도 내가 욕망하고 있는 질문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엄마와 대화를 하다가 같은 듯 다른 질문을 했다.
"엄마, 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아."
"세상사 살면서 너의 방향이 있을 거야.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
네가 추구하는 바를 생각하면서 행동해."
오늘도 생각한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고 추구하는 삶의 방향타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