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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l 26. 2024

냉장고에 묵혀놨던 모든 것들을 털어낸 하루

냉동고 같은 내 마음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눈은 다른 날보다 유독 퀭해 보였다. 최근에 출퇴근하느라 피곤한 탓이겠거려니 굳이 묻지 않았는데, 반대편에서 먼저 운을 띄운다. 한숨을 푹 쉬며 하던 말. '태풍이 지나갔어.'


언젠가부터 엄마는 거실에서 이불을 깔고 잠을 잔다. 반년 전부터 집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밤마다 난다고 기분이 이상하다고 했었는데, 그저 기분 탓이겠지 아니면 내가 예민해서 그럴 거라며 이내 무시했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어느 날 밤, 거실 불을 환하게 켜고 거실 에어컨 모서리부터 차례로 살피기 시작했다.



거실을 다 둘러보고 주방에 딱 들어선 순간, 똑 소리가 나서 뒤돌아본 곳은 바로 '냉장고' 냉장고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냉장고 바닥에 흥건하게 물이 떨어져 수건을 깔아놓던 그곳을 치우던 날마다 누워있는 그녀의 등 뒤로 뚝뚝 소리가 났던 것이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야


센터에 전화해 물었더니, 냉장고를 수리해야 한단다. 결국 수리기사 아저씨가 오시기 전에 미리 냉동실을 비워야만 했단다. 오 년 전 얼려놓았던 떡, 몇 개월 전 먹겠다고 얼려놨던 전들. 언제 샀는지 알 수 없는 고기들까지. 냉동실 안에 이렇게 많은 재료들이 있었는데 냉장실을 열어보니 똑같은 재료가 또 수북했다는 것이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던 냉동실에 있던 것들을 하나씩 버려내는 순간, 뭔지 모를 쾌감이 느껴졌던 걸까? 엄마는 이 상황을 갑자기 '태풍'이 들이닥친 날이라고 표현했다. 태풍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긴장감이 엄습해 오지만 지나고 보면 태풍은 지저분했던 거리를 청소해 주기도, 뿌옇던 하늘을 깨끗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태풍이 두렵지만 때론 좋을때도 있다


마음도 똑같아 진짜


마음도 냉장고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일 년 정도 남편은 취업 준비를 했다. 그 기간 동안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마음에 무언가가 쌓여갔다.


올해 초 남편은 작은 회사에 취업한 그에게 짙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질투가 날 정도로 회사에서 그는 정말 잘 지냈다. 경기가 안 좋아지고 게임 산업이 차례차례 힘들어지면서 “회사가 어려워.”라는 말과 동시에 3주 뒤, 등 떠밀려 수습이 끝난 3개월 차가 되어 남편이 퇴사했다.


파이팅 넘치게 취준을 시작했지만 타의에 의해 취준을 하게 된 그는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늘 긍정적인 말과 응원으로 어깨를 토닥였다. 돌아오는 건 자조적인 농담일 뿐. 그게 참 아팠다.


혹시 이 일을 여기까지만 하면 어쩌지.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삼켰다. 자존감이 낮아진 남편을 보는 게 속상했다. 그렇게 냉장고 저 구석에 감정을 꽁꽁 얼려두어 놓았다.


숨겨 놓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버린 건 바로 어제. 그날 아침에도 일 전화로 화가 나 있던 상태였다. 심각한 두통이 있었던 그때. 남편에게 말했다.


- 여보, 나 두통약 좀 가져다 줄래?

- 혹시 두통약 없이 괜찮아질 수 있을 텐데... 꼭 먹을 거야?


비가 오고 나면 이렇게 개운해지는 걸


설마, 된 거야? 거봐 될 거랬잖아라는 말보다 고생했단 말이 먼저 나왔다. 남편의 표정이 녹아버린 걸 보자 냉장고 속에 얼려있던 마음들이 조금씩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하루 종일 좋은 기분으로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내고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아빠의 전화가 왔다.


- 우리 딸, 고생 많았다.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쩍쩍 갈라지던 내 마음이 모두 녹아버렸다. 그러고 나서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마음의 문을 열면 온갖 감정들을 마주하곤 놀랐겠지.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남편의 마음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모두 알고 있었다.


남편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혹시나 태풍을 만날까 무서웠다. 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며 보냈다. 묵은 감정들을 확인하게 되면 취업 준비를 하는 데 방해가 될 테니까.


내 마음속을 분명 열어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늘 이렇게 들켜버린다. 아마도 그들이 알아주기를 바랄지도. 이젠 내 냉동고보다 사랑하는 이들의 냉동고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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