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인생은 고통의 연속인거야
삼십 대가 되자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서울에 나가면 노상 몸살이 걸렸다. 필요한 곳에 노트북을 두고 움직이는 게 일상이 된 요즘. 결국 짐이 무거우면 에너지 관리가 어렵다. 내가 지닌 짐처럼 마음에 지닌 짐 또한 줄여야 인생이 어렵지 않다.
스무 살 후반부터 삼십 대 초반. 내가 손을 뻗는 모든 분야를 다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 같은 게 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느껴지는 게 모든 것들을 줄이고 작게 하는 게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삶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단순화하자. 이러한 지혜를 왜 어릴 때는 몰랐을까.
일을 하는 분야를 넓히고 싶었던 이유는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지금보다 더 아니, 누구보다 더 잘 살고 싶은 비교하는 마음이 들면서 결국 복잡한 삶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분명 AI가 일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었다고 하지만, 여러 일을 병행하면서 계속 온라인과 연결되는 상황에서 개인과 삶의 생활이 모호해지는 건 마찬가지다.
몸이 가벼워짐과 동시에 인간 관계도 무거운 게 싫어졌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소중했지만 너무 많은 좋은 사람들은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들 사이에서 분명 좋은 시너지가 나긴 했지만, 점점 나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인풋이 나를 갉아먹었고, 결국 나 스스로 빛나는 걸 찾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사람들의 모습에서 롤모델을 찾았다. 롤모델을 갈망하며 또 새로운 욕망이 생기는 고통의 순환구조가 만들어져 힘들었다. 일상을 살아가며 모든 연결고리를 다 끊어낼 순 없지만, 욕심이 있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걸 잘하고 싶은 완벽주의자다. 글 쓰는 일도, 운동도, 일에서도. 모든 분야에서 프로가 되고 싶었지만 너무 해야 할 일이 많은 탓에 쉽게 놓쳐버리기 일쑤였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 또한, 시간이 괜찮은 거야?라는 질문으로 나의 안부를 묻는 게 일상이 된 걸 보니, 좋은 신호는 아닌 것 같다.
성취하고 욕망하며 결국 고통을 받게 되는 구조. 쇼펜하우어 또한 그렇게 우리 삶을 그렸다. 그는 "인생이란 고통과 권태를 왔다 갔다 하는 추"라고 표현했다.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이고 세계는 최악이다."라는 말로 제 마음을 후려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나름의 조언을 주었다.
고통스러운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건 '예술'이다. 무개념성과 무목적성을 가진 예술은 지옥 같은 인생의 고통을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특히, 음악은 예술의 꽃이다. 음악은 의지의 본질 그 자체를 직접 표현한다. 철학이 세계의 본질을 보편적인 개념을 통해 반복하고 표현하는 것이라면, 음악은 형이상학의 무의식적인 연습이. 음악을 통해 표현되는 의지, 즉 감정은 개체적이고 개별화된 인격적 감정이 아닌 보편적 감정이며 음악은 보편적 언어로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상한다.
음악은 인간의 삶과 직결된 근본 언어이자, 존재론적 언어다.
그렇기에 보편적 언어로의 의지를 발견하고 싶다면 음악을 들으며 내 마음을 위로해 보자.
누구에게나 삶은 견디기 힘들다. 고통은 필요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의욕, 욕망은 고통의 원인이 된다. 무언가를 성취한다고 해도 또 다른 성취를 욕망하게 되면 자연스레 고통이 따라오게 된다.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삶을 '직시하는 태도'다. 모든 의욕에서 벗어나 관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삶의 고통을 인정하자. 결국 스스로를 구하는 건 오직 나뿐이다.
(*관조: 주관을 떠나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깊이 생각함, 사전적 의미로는 통찰, 관찰과 일맥상통)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게 인간 마음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하거나, 죽을 때까지 다 갖지 못한다. 인간의 욕망이란 끝없는 목마름과 같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면 욕망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강용수 저
의지란 순수하고 맹목적인 힘이다. 즉, 자기가 갖지 않으려는 것을 채우려는 끊임없는 자기 움직임과 분투의 노력이다. 본질적인 생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동질감을 가진다. 이 동질감이 이어져 결국 '연민'으로 확장된다. 내 윤리학의 토대는 바로 '연민'이다. 연민을 가지게 되면 자신의 현존에 대한 염려 대신에 모든 생명체에 대한 연민으로 확장된다. 이를 통해 비로소 나의 고통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고통을 중심으로 인생을 사유한 쇼펜하우어는 대표적인 염세주의자다. 욕망하며 투쟁하고 대립하는 과정을 곧 원초적 의지로 보았다. 근원에서부터 맹목적이고 제어될 수 없는 충동을 겪는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 되는 과정이다.
그의 반려견 이름은 아트만(atman)이었다. 아트만은 산스크리트어로 '자아' 또는 '영혼'을 말한다. 힌두교 철학에서 아트만은 '불멸의 본질'을 나타낸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어릴 적, 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으며 동양 철학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우파니샤드를 읽었다고 한다.
(*우파니샤드: 힌두교 주요 경전)
인생의 마지막쯤이 되어서야 쇼펜하우어는 오랫동안 바랬던 철학적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 사후에야 관심받게 되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을 하도록 만드는 경이감은 분명히 세계 안에서 있는 고통과 악을 바라보는 데서 생겨난다."라고 말했다.
고통을 받는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나아가 세계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해석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테니 말이다. 수많은 욕망들 사이에서 번뇌하지 말고, 욕망의 수를 줄이고 욕망의 크기 또한 줄여서 내가 진짜 원하는 바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
참고자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안광복
<쇼펜하우어, 돌이 별이 되는 철학>, 이동용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강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