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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과 산책 Sep 04. 2023

23. 영양제가 필요한 순간

난이도 조절의 기술

  여행을 하다 보면 난이도 높은 순간이 때때로 찾아온다. 예상 못한 어려움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 충분히 예상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도 하다. 어떤 어려움이든 난이도 높은 단계를 통과하고 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여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일은 코리페섬 모래사장에서 캐리어를 끄는 일이었다. 캐리어를 끌어당길 때마다 모래의 무게가 차곡차곡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에 푹푹 들어가는 캐리어 바퀴가 야속할 따름이었다. 코리페 섬에 도착한 날에는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었고, 코리페섬에서 나가는 날에는 이미 겪어서 알고 있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섬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이었다. 나가는 배를 타는 선착장을 가려면 처음 내렸던 곳보다 더 먼 곳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할 뿐이었다. 다시 아오낭으로 돌아가는 날, 시작부터 체력이 엄청나게 소모되었다. 시간이 늦어져 배를 놓치거나 배를 잘못 타는 일이 일이 생기지 않게 예정시간보다 일찍 준비해 나온 것, 우리가 타야 하는 선착장이 맞는지 여러 번 확인하는 것이 그나마 난이도를 더욱 높이지 않는 방법이었다.


 오전 9시 30분 배를 타고 Bak bara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서인지 원래 그런 건지 1시간 반 동안 디스코 팡팡을 타는 기분이었다. 배가 팡팡 튀어 오를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불안을 감추는 미소를 지었다.

“엄마 놀이기구를 끊은 거야?” 첫째 아이가 던지는 능청스러운 농담이 그저 고마웠다.

 

 우리를 태운 대형 놀이기구는 11시 정도에 Bak bara 도착했다. 여기서 미니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순간에 현지여행사 직원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를 따라 미니버스를 타러 갔다. 태국여행 중에 이런 과정은 굉장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긴장되는 순간이다. 미니버스는 12인승 승합차였고 이미 그 안에는 덩치 큰 서양 여행객들로 채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맨 앞 좌석 운전석 옆에 나란히 앉고 나는 혼자 뒷좌석에 앉았다. 잠시마나 아이들과 떨어져 앉으니 한갓진 기분이 들었다. 2시간을 달린 미니버스는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즈음 휴게소에 멈췄다. 우리는 간단한 스낵을 먹고 다시 탑승하려는데 둘째 아이가 나랑 앉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첫째 아이는 혼자서 외국인들과 섞여 앉는 게 싫은 눈치였다. 아이들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캐리어를 끄는 일이 난이도 5에 해당된다면 아이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은 난이도 4 정도로 까다로운 일이었다. 간단하게는 식사 메뉴를 정하는 일이나 뭐 하며 놀지, 누가 먼저 씻을지 같은 의견조율이 필요한 사소한 순간들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니 아들 둘과 하는 여행은 난이도 높은 여행임에 틀림없다. 일단 두 아이의 설전을 지켜보았다. 팽팽한 의견대립에 내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의견을 잘못 제시했다가는 화살이 나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일쑤였기에 최대한 말을 아꼈다. 두 아이중 누구를 어떤 방법으로 설득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찰나에 "대신 5000원 줄게"라는 말이 둘째의 입에서 나왔다. 첫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갈등을 돈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웬만해선 언급되지 않는데 미니버스가 곧 출발한 시간이 다가오니 마음이 급해진 둘째 아이가 내놓은 카드였다. 극적으로 합의가 이뤄졌고 나는 둘째 아이 옆에 앉아 아오낭으로 가는 내내 아이의 목베개가 되어주었다.

 4시 30분경 우리는 아오낭 아난타 부린 리조트에 체크인을 했다. 우리가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수영장에 워터슬라이드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오낭 아난타 부린 리조트는 코리페의 그린뷰 방갈로에 비하면 편안한 숙소였지만 첫째 아이는 분위기가 촌스럽다며 맘에 안 든다고 궁시렁거렸다. 코리페의 방갈로가 그리워진다고 했다. 그새 자연친화적인 숙소의 멋을 알아버린 건가 싶어 반가웠지만 이제 그만 툴툴거려 주길 바랐다. 우리는 곧바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이 또한 난이도 상에 해당하는 일정이었지만 에너지가 남아도는 아들들이 원하면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게 아들 엄마의 숙명이다. 그래서 아들을 키우는 엄마에겐 극강의 체력이 요구된다. 나는 워터슬라이드를 두 번 타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끼던 펑키타 수영복에는 구멍이 나고 엉덩이에는 상처가 나고 허리엔 통증이 있었다. 편의점에서 파스를 사서 바르고 근육통 약을 먹고서야 조금 나아졌다.


 다음 날도 오후 내내 워터슬라이드를 탔다. 이곳에 온 이유가 워터슬라이드를 타기 위함이니 우리는 마땅히 워터슬라이드를 타 줘야 했다. 나는 아침에 뽀그르르 물에 타서 들이킨 발포 비타민 한 알이 효력을 발휘해 주길 바라며 오후 내내 수영장 자리를 지켰다. 긴 여행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영양제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여행에서 난이도 조절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난이도에 따라 나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 방법이 체력단련이든 영양제이든.


그리운 코리페 방갈로
코리페 선착장
“엄마 놀이기구 끊은거야?”
다시 아오낭으로 가는 길



아오낭 아난타부린 수영장 워터슬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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