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을 달래는 기술
긴 여행을 떠나오면 고국이 그리워지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 시기가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떠나온 곳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 시기가 언제 나에게 찾아오는지 여행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내 친구들이 보고 싶고,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고, 늘 다니던 거리를 걷고 싶고, 내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 중에 그 시기가 찾아오면 조금 지쳤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느슨하게 여행을 한다. 그리고 한국 음식을 찾는다. 일종의 향수병을 달래는 기술이다. 여행지에서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오감은 오직 미각뿐이기에 입으로 들어오는 것을 한국의 맛으로 채우고 나면 향수병의 증상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곤 했다. 그마저도 해결하기 어려운 오지를 여행할 때는 향수를 앓는 수밖에 없다. 아들의 일기장에 한국에 가고 싶으면서도 가기 싫은 마음과 한식이 먹고 싶다는 이야기가 쓰이기 시작했다. 향수병 초기 증상으로 보였다.
소울일기 | 2023.1.14
오늘 제일 좋았던 순간은 핸드폰을 하면서 가장 편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매트리스에 몸이 쫙 들어가서 포근했다. 여행 7일째의 소감은 한식을 너무 먹고 싶다. 솔직히 한국에서는 맨날 한식을 먹어서 태국 가면 한식 소리는 절대 안 할 줄 알았는데 이곳에 있으면 있을수록 한식이 엄청 땡긴다. 일단 떡볶이 하고 짬뽕이 너~~~~ 어~무 먹고 싶다. 방콕 가면 꼭 3번은 먹을 거다. 또 다른 소감은 무언가 태국이 너무 화려해서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것이다. 한국을 가고 싶은 데 가기 싫다. 끝.
코리페 섬에는 walking street라고 이름 붙여진 여행자 거리가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상점과 식당과 카페와 Bar가 즐비한데 한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부터 태국의 남쪽 작은 섬에 한식당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 길에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있었다. 태국의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휴식처이자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저장고이자 우리의 향수병을 달래 줄 김치 사발면이 있는 맛집이었다. 코리페섬에서 머무는 동안 세븐일레븐은 우리의 참새방앗간이 되었다. 물을 사러 들어가고 더워서 들어가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들어가고 스케치북이 있는지 찾으러 들어가고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도 들어갔다.
세븐일레븐에 처음 들어간 날 우리가 발견한 것은 불닭볶음면이었다. 향수병 초기증상에 시름거리던 아이들의 눈빛이 불닭볶음면을 보고는 반가움으로 초롱초롱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운걸 잘 먹지도 못하는 둘째도 불닭볶음면을 먹겠다고 호기롭게 덤볐다가 매운맛을 제대로 맛보고 엄청난 물을 들이켰다. 그 후 아이들의 향수병 증세도 한시름 가라앉았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는 말에 담긴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한 조언에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게 해주는 말이 되었다.
향수병을 달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는 일이다. 여행지에서 엽서를 쓰는 일은 나의 오래된 여행 습관이기도 하다. 이 기술을 쓰기 위해서는 여행을 가기 전에 가까운 이들의 주소를 미리 여행 노트에 적어둬야 한다. 이곳 코리페의 풍경이 담긴 엽서를 고르고 그곳의 안부를 묻는다. 이곳에서 느끼는 시시껄렁한 감정들과 이곳에서 보는 이국적인 풍경들에 대해 엽서에 꾹꾹 눌러 적으면 잠시나마 그곳에 있는 친구에게 마음이 닿는 것만 같다. 그리움을 달래는 소소한 방법이지만 쓰는 나에게도 이 엽서를 받는 친구에게도 기분 좋은 추억이 되는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