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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과 산책 Aug 31. 2023

22.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아

특별한 하루를 만드는 기술

 섬에서의 마지막 하루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뭔가 특별한 걸 하고 싶었는데 딱히 특별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은 코리페에서 가성비 좋은 스노클링 투어도 마다하니 그냥 섬에서 보낸 다른 날처럼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안 가본 식당에서 쌀국수로 점심을 먹었다는 것과 선라이즈 해변의 적당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모히토 한 잔을 시킨 것이 오늘의 특별함이었다. 쌀국수는 기대보다 맛이 없었고 적당한 자리를 잡느라 아이들과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는 것이 오늘의 피곤함이었다. 특별함은 피곤을 동반할 수도 있었다.



 나는 카페에서 모히토 한 잔을 시켜두고 책을 읽고, 첫째는 해변에서 공을 튀기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둘째는 성룡 영화를 보겠다며 Pad를 들고 wifi를 찾아다녔다.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첫째의 공이 해변에 누워 태닝 하는 여행객에게 갈까 봐 조마조마했고 둘째의 wifi는 자꾸 끊겨서 "엄마!"를 수시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모히토를 시키며 상상했던 내 모습과 내가 마주한 현실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에휴.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에게 이런 상황은 익숙하기만 한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 이유는 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에 의미를 부여한 탓인 듯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이 내가 그리는 모습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 짜증이 밀물처럼 소리 없이 밀려왔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오늘은 이 섬에서의 마지막이지 한 달 살이 여행의 마지막 날도 아니었다. 내일도 여행을 계속해 가야 했다. 설사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특별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여행 자체로 특별한 시간이었으니까. 생각이 이렇게 미치니 나의 짜증은 썰물이 되어 가라앉았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때론 같은 상황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걸 알기에 책을 덮고 지금 나의 동행자인 아이들과 함께 즐거울 일을 하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셋이 여행 온 상황에서 "너희끼리 놀아"가 안 통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게 오늘이었고, 알아서 놀만큼 다 컸다고 생각이 드는 아이들도 엄마가 같이 놀아줘야 놀이에 흥이 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알면서도 알아서 놀아줬으면 하는 게 엄마의 마음인 건 안 비밀이다.)


 카페에서 나와 아이들과 공을 차고 놀았다. 해변의 강아지들 마냥 공을 바다로 멀리 던져주면 달려가서 잡아오는 놀이였다. 공을 바다로 힘껏 차면 아이들을 동시에 바다로 뛰어갔다. "아이구~ 내  똥강아지들"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모래찜질을 해주겠다고 나를 모래에 파묻길래 이왕 모래에 묻은 거 인어공주를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뱀장어로 만들고 낄낄거렸다. 오줌이 마렵다는 둘째에게 바다에 들어가 해결하라고 했더니 바닷속에 성게가 있을까 봐 혼자는 못하겠다며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못 이기는 척 같이 손잡고 바다로 들어가 나도 편안하게 볼 일을 봤다. "엄마도 싸고 있어!"라는 말에 아이는 잡은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아이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변에서 한참 놀다 보니 뭔가 시큰둥했던 아이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밝아진 모습에 내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렇게 선라이즈 해변에서 뛰어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특별한 일이야.' 섬에서의 마지막 날을 특별한 하루를 만들고 싶어 하는 내 마음속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해변에서 푸르른 인도양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일. 인도양 바다에 손 잡고 들어가 오줌을 누는 일. 마지막으로 코코넛빵을 사 먹는 일. 세븐일레븐에 가서 몸을 식히는 일. 시간이 지나 오늘을 회상해 본다면 이런 사소한 일들이 특별한 일로 기억될 것이었다. 코리페섬에서의 마지막 날에는 아침 6시 39분에 해가 뜨고 저녁 6시 27분에 해가 졌는데 해가 뜨고 지는 광경을 일부러 그리고 우연히 본 특별한 하루였다. 내일 아침에는 짐을 싸야 해서 오늘은 특별히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


소울일기ㅣ 2023.1.19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고기가 들어가 있는 밥을 먹고 굼뱅거리다가 반대편 해변에 갔다. 투정쟁이 김*이씨가 말을 안 듣는 날이었다. 일단 그냥 카페 앞에 자리를 잡고 류이는 좋은 곳에 와서 영상 보고, 엄마는 좋은 곳에 와서 책을 읽고, 나는 좋은 곳에 와서 쓸쓸하게 이상한 이야기를 썼다. 그렇게 해변에서 우왕좌왕 놀다가 숙소로 돌아와서 씻고 또 굼뱅굼뱅 거리다가 잤다. 좀 짧은 하루였다. 일기에 하루를 다 담지는 못하지만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싶다. 종종 태국에서 류이랑 싸워서 엄마가 여행 와서 뭐 하는 거냐고 말할 때마다 생각했다. '이렇게 싸우는 건 그만큼 이곳이 편하다는 게 아닐까? 너무 익숙해져서 편하게 생활하는 게 아닐까?'라고 말하며 일기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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