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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Apr 04. 2023

떠나는 이야기 #2

병상에서

맨 처음 아빠의 암을 발견한 것은 아직 대학생이던 2008년이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벚꽃으로 가득했던 4월의 석촌호수와, 병실 창 밖으로 쏟아지던 보석 같은 햇살이 연이어 생각납니다.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계절이라는 찬란한 봄, 그땐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졌다고 생각했어요. 당장이라도 우리 집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아서 매일을 울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렇지만 의외로 대학생이던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결혼을 할 때까지 병은 조용했고, 가족이 늘었으며, 그래서 - 내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안도하게 되었습니다.


5년이 지나면 완치라며 스스로 위로하고 일부러 잊으려고 했던 것도 같습니다.


신혼에 젖어 있었고 남편은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습니다. 잘 보살펴 드리고 간병에 힘쓰면 괜찮을 거라며 위로했고, 저는 그렇지 못할 거라는 걸 직감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죠.


입원한 아빠를 보는 기분은 슬프고 피로했습니다. 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새 입원복을 받아 오고 가끔 드시고 싶어하시는 컵라면을 끓여 오고, 때로는 병실에서 쓸 소소한 물건들을 사러 함께 지하 슈퍼로 향하다 놀랄 정도로 천천히 걷는 아빠의 모습에 조금씩 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장성한 자식이 옆에 앉아 종일토록 조잘댈 수 있는 이런 시간이 너무 즐겁다고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 비참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시간만 더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는데. 병상 머리맡의 대화로 끝날 봄이 아닌데.


0에서 10까지로 통증의 정도를 설명해 보라는 말에 서슴없이 100은 없나요? 하며 힘없이 웃는 아빠의 모습에서 마음이 말 그대로 박살났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달라지는 낯빛은 이미 남아있는 시간의 척도였습니다. 그 와중에 고통스러운 항암이 지속되면서 간헐적인 섬망증상이 나타났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와중에 아빠의 전화가 울려와 급히 받아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했고요, 밤이 되면 그렇게 자식들을 불러 오라며 어머니를 닦달해 새벽 전화통화로 간신히 달래기도 잦았습니다.


이 모든 고통을 신혼인 남편에게 100% 공유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마 자존심이었던 것 같아요. 상견례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셨는데 이렇게 안 좋은 상태였어? 하고 놀라는 것도 내심 속상했고요, 나도 이 지경인지 몰랐어, 하고 말해봤자 내가 들어도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대답처럼 들렸으니 안팎으로 어디 호소하기도 어려운 인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기적인 정신으로 좀 더 제 자신이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도 그 시간이 내게 지극히 괴롭기를, 너무나 힘들어서 심지어는 언젠가 아빠를 잃은 후조차 지금 이 고통에 비하지 못하기를, 매일매일 내일은 더 힘들기를 바라며 나중에 나중에 - 있잖아, 아빠가 없어서 지금 너무나 슬프지만 그때 우리 간병할 때, 그땐 진짜 더 힘들었지 기억나? 하고 - 위로하게 되길 바랐습니다. 얼마나 미친 생각인지요?


물론 그런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 아빠가 떠나는 날이 오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떠나는 사람을 간병하는 게 아무리 힘겨웠기로서니 사람 죽는 일보다 더 괴로운 건 없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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