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절대 다 자라는 시점이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남편과 딸의 통화 내용을 듣는데 갑자기 화가 났다. 스피커 폰을 했기 때문에 몰래 들은 것은 아니지만 남편의 언행을 비유하면 마치 폭싹 속았수다의 학씨 미니어처 같다. 표현이 아주 상스럽기도 하고 철딱서니 없다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내용은 이렇다.
"요즘 아빠가 돈 못 번다고 너 일부러 전화도 안 하고 무시하냐?"라는 말에 딸이 혼내는 소리가 들린다.
"왜 아빠는 자기 맘대로 생각하냐고, 바빠서 과제한다고 숨 쉴 틈도 없는데 아빠가 돈을 벌든 못 벌든 내가 연락하는 거랑 무슨 상관있어서 그러냐..."
남편은 최근 경제적인 부분에 스트레스가 심하다. 어쩌겠나. 사업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냐고 넉넉하진 못해도 밥은 먹고살 수 있으니 다행인 것 아니냐고 위로하지만
"내가 돈 못 벌면 네가 날 무시할 거잖아!"라며 매를 번다.
'속상하다. 뜻대로 안돼서 화가 난다. 면목없다.'라는 말을 스스로 하려면 도대체 몇 살이 되어야 할까?
마음에 있는 말을 표현하기보다는 "내가 망하면 너희들 나를 버릴 거지. 무시할 거지. 인간 취급 안 할 거지."라는 불안으로 나나 아이들을 찌른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성장배경을 이해하지만 그럴 때마다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올라온다.
도대체 어려서 뭘 가르쳐 놓은 건가 싶다.
사업이 잘 되면 잘 된다고 술, 사업이 안되면 안 된다고 술.
좋은 학교 나와서 집안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에 열심히 살아오신 만큼 허세와 허풍과 패배감으로 깎아 먹은 인심이 한 트럭이다. 종종 내 환상 속의 가정폭력 모습은 내 아빠가 새엄마에게 했던 행동과 남편에게 들었던 시아버지가 시어머니에게 했던 행동에서 만들어진 상상력의 산물이다. 어쩌면 두 가정폭력의 희생자가 만나서 한 가정을 만들었고, 서로 그 카르마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뿌리 깊은 정서적 유산은 탕진하지 않나 보다. 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고 멀쩡한 주변을 가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그 방식이 징글징글하다.
남편의 핵심감정은 원망과 억울함이다. 스트레스받을 땐 그 억울함이 견디기 힘든지 주변 사람들을 괜히 들먹여 흔든다. 괜히 오래전 일까지 들춰서 '전에~'라는 시작으로 기억력 자랑을 한다. 그 종결어미는 '때문이다.'로 끝나니 듣는이 입장에서는 감정이 들썩이지 않을 수 없다.
아이가 가까이 있으면 같이 대화라도 나누면 좋겠지만 그 아이 역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스스로 아빠를 이해하고 감당하도록 기다려 본다.
대신 남편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바로 눈초리를 보낸다.
"그렇게 나잇값 못해야 자기 답다고 느끼는 거지? 어른스럽게라는 건 어디서 보고 배운 적도 없는 거지?"
나의 비아냥에 "내가 뭐?!"라고 하다가도 바로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토록 아버지 닮고 싶지 않다지만 똑 닮아 버린 모습인 게다.
참 어려운 어른 노릇...
죽을 때까지 자라야 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의 슬픔이 아닌가 싶다.
최근 남편과 함께 보는 드라마가 있다.
폭싹 속았수다.
그 드라마 속의 양관식과 학씨를 보면서 아빠의 모습에 대해 고민해 보라고 했다.
나 역시 엄마 노릇을 못할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엄마 공부를 작정하고 뛰어들었지만 어렵고도 험난했다. 그렇다고 잘한다고는 못하지만 배운 만큼은 해내고 있다고 본다.
시아버지가 학씨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남편은 그나마 학씨가 양관식을 따라 하려는 모습으로는 진화했다. 아마 술과 담배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진화가 가능했지 않았나 싶다. 스스로 노력하기도 했고...
그러나 우린 아직 더 자라야 하는 어떤 마음을 각자 안고서 살아가고 있다.
애한테는 좀 그만하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