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은인일지도 몰라
어제는 남편이 최근에 이직한 사람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옮긴 것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지 먼저 연락 와서 인사하고 싶다고 했다길래 흔쾌히 만나기로 했단다.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은 감정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혈질 기질을 타고나서 한순간 욱할 때도 있지만, 금세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하며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과는 진심이기에 오래도록 관계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이런 부분이 맞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12년 전 그날, 이혼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새 직장 이야기가 나왔다. 남편은 문득 간 김에 후배들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 근처까지 왔으니 커피라도 들고 가볼까 싶었단다. 불쑥 찾아가는 게 실례일 수도 있지만, 분위기를 봐서 어색하면 그냥 내려오자고 생각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고 한다.
이 바닥이 원래 좁다. 서로 아군과 적군을 나누기 시작하면 금세 관계가 막혀버린다. 그래서 남편은 ‘적은 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후배들과 대화를 이어가던 중, 남편은 갑자기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늘 뒷짐 쥐고서 이 자리 저 자리 참견하고, 말로 다그치며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분명 그 바닥의 조상급으로 베테랑이고 막힌 문제도 척척 해결하고, 회의에서 실마리가 안 보이면 경험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던 상사다.
30대 초반이던 남편은 그 사람이 나타나면 "또 뭐라고 트집 잡으려고!"라는 마음에 늘 전투태세였다고 한다. 상대방이 어떤 질문을 하든 다 대답하려니 머릿속이 늘 복잡했고, 한두 번 크게 망신을 당한 경험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신경이 쭈뼛 섰단다. 결과적으로는 그 상사 앞에 서면 설수록 남편의 내공은 깊어졌고 자신도 이날까지 고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은인이었단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인기척만 느껴져도 밥맛이 뚝 떨어지고 입이 바짝 마르던 남편이었다.
문득 자신의 모습이 후배들에게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자신은 음주가무도 즐기지 않고 스몰토크로 주변과 잘 교류한다고 느꼈을 테지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단다.
남편은 후배들에게 말했다.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 테니까.”
그러자 그 옆에 있던 한 명이 대뜸 어떤 자료가 업데이트가 안 돼서 필요한데 있냐고 물어왔단다.
남편이 얼마 전 정리한 게 있노라며 바로 그 자리에서 찾아서 보냈다고 한다.
"내가 좀 그래. 뭐에 빠지면 그것만 보이고 다 해결하고 나면 주변이 싸할 때가 좀 있더라고. 그래도 결과가 좋으면 그건 당연히 각자가 감당할 몫이라고 여겼는데... 요즘 생각해 보니까 내 고집이 너무 세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었겠구나 싶었어. 혹시 그런 게 마음에 있다면 너그럽게 좀 봐주게. 그리고 서운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고... 이 나이가 되니까 남들이 이야기를 잘 안 해줘. 어려워만 하니까..."
사무실을 나오는데 후배들이 배웅하며 언제 저녁이라도 하자며 인사를 나눴단다.
내려오는 길에 가장 많이 떠오른 건 "야이 고집불통아!"라고 지르던 내 목소리였다고 한다.
남편이 답답할 때면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한 시간들이 빛을 본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우리는 엄청나게 소리 지르며 당장 끝을 보겠다고 혈기 왕성했던 시절도 있었다. 12년 전의 그 일은 또 언젠가 떠올려보겠지만...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도 모르게 뒤통수를 쓰담쓰담했다.
"오구오구. 오늘 큰 일 하나 해결하셔쎄요~"
"해결인지는 모르지..."
"그 사람들이 은인이네. 그 사람들 아니면 어떻게 자기를 돌아봤겠어. 고마워해!"
문득 내가 어려서 보던 어른들도 이런 고민으로 자신의 시간을 살았겠구나 싶다.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줄 알았는데, 자신의 고민 앞에서는 어떤 게 어른 다운 지, 지혜로울지, 현명하게 헤쳐나가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했겠구나.
그 고민의 흔적이 있는 사람에게서 향기가 났던 것이구나...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가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