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잔대마왕
감정적으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거의 인류애, 우정에 가까운 정도라는 것을 파악했지만 에로스적인 사랑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중년이 되면 남성은 여성화가 되고 여성은 남성화가 된다는데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닌 에피소드들이 넘쳐난다.
드라마 보고 우는 것은 흔해졌고
PMS처럼 한 달에 한 번씩은 괜히 뚱하거나 세상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중학생 아들과 즐겁게 시작한 농구 게임의 끝은 파국으로 치닫아서 들어오는가 하면
웬만큼의 생활습관은 지적할 유효기간을 넘긴지라
서로가 어느 정도 맞춰서 산다고 여기지만...
도무지 납득 안되고 불쑥불쑥 화가 나는 장면은 바로 '식사 자리'다.
도대체 저 남자는 밥 먹을 때마다 무슨 경험을 한 것인지...
"말은 후한데 마음은 쪼잔대마왕"이라고 별명을 붙였다.
어제저녁은 닭갈비를 했다. 물론 밀키트의 힘이다.
닭을 좋아하는 아들을 생각해서 넉넉하게 먹으려고 두 개를 뜯었고,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 떡을 추가했기에 세 식구가 먹기에는 아주 많은 양이었다.
배고픈 내가 먼저 먹었고, 남편은 아들이 오면 먹는다고 했다.
학원을 늦게 마친 아들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오~ 맛있는 냄새! 배고파 밥 줘!"라고 주방에 가더니
"오~예! 닭갈비! 나이스 은별!"이라며 주먹 인사를 건넨다.
둘이서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소파에 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남편의 나무라는 소리가 들린다.
"왜 그걸 니 그릇에다 다 옮겨! 한 번에 하나씩 먹지?"
"내가 다 먹는 것도 아니고 먹을 만큼만 덜어 간 거잖아!"
"그렇게 네가 다 가져가면 나는 뭐 먹으라고?"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잖아! 나 배고파! 많이 먹으라고 할 땐 언제고..."
지지 않는 아들을 응원한다.
밥상에선 좀처럼 '한'이 삭히지 않나 보다.
남편과 살면서 가장 치사하고 꼴사나운 장면이다.
남편은 밥상에 아무리 반찬이 많고 후하게 있어도 누군가가 한 메뉴를 맛있게 먹고 있으면
"야! 그거 니 혼자 다 먹으려고?"라며 나무란다.
"양 많으니까 괜찮아. 둬!"라고 하면
"지만 입인가. 왜 다 먹어치우려고 해!"라고 한다.
그렇게 인심을 잃은 게 수십 번이다.
기분 좋게 갈비찜을 해 놓고서는 잘 먹는 우리를 보면서
"한 번에 다 먹고 없애려고! 그만 먹어!"라고 한다거나
오랜 시간 공들여서 김치찜을 해 놓고서는 야들하게 잘 읽은 고기를 먹으면
"왜 고기만 골라먹어! 고기 그만 먹어!"라며 브레이크를 건다.
파김치가 맛있어서 먹고 있으면 "그거 며칠 만에 없애려고?"라며 뚜껑을 닫아 넣는다거나
스팸을 한 통 구워서 먹으면 "혼자서만 다 먹냐!"며 와서 맨 입에 한 두 개를 뺏어 먹어야 한다.
남편과 웬만해서는 밥을 안 먹으려는 우리의 이유다.
"아빠는 많이 먹어!라고 했으면서 막상 맛있게 먹잖아? 그럼 막 안 남겨 놓는다고 야단쳐. 그래서 아빠가 한 거 먹기가 싫어. 그냥 식당 가서 그 자리에서 밥 다 먹고 나오는 게 깔끔해!"
딸이 한 말이다.
하루는 진지하게 물었다.
우리가 먹는 거 보면 아까워서 그러느냐, 아니면 먹는 거 보면 괜히 심술 나냐. 도대체 왜 그러냐?
"너희들이 잘 먹으면 좋지. 나도 기분 좋아!"
"기분 좋은 사람이 우리가 먹는 거 뚜껑 닫고 치우거나, 다 못 먹게 야단쳐?"
"몰라... 그냥... 다 먹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왜 다 먹으면 안 되는 건데? 먹자고 한 거 아냐? 많이 먹으라며. 먹자고 한 거잖아. 전시하려고 한 거야?"
"미안 미안. 그래 내가 또 그랬네. 담엔 안 그럴게!"
"이게 한 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몰라. 나도 모르게 불쑥.."
"아냐. 불쑥이 아냐. 태양이가 잘 먹잖아. 그럼 보는 순간 표정이 바뀌어! 그리고는 갑자기 화를 낸다니까. 그거 몰라? 도대체 왜 그러냐고!"
"내가? 언제? 난 진짜로 잘 먹는 거 보면 좋은데?"
"아.. 안 되겠다. 우리 카메라 설치해야겠다. 아빠가 자기 모습을 몰라. 진짜 이상해!"
딸은 한술 더 떠서 카메라 설치해서 남편의 모습을 보도록 해야 된다고도 했다.
맞다.
도대체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오늘도 퇴근 후에 맛있게 됐다며 밥 먹으러 나오라고 재촉하는데 맛있는 김치찜 냄새가 났다.
이번에는 고기 대신 스팸을 넣었길래 아들이 좋아하겠다 싶었다.
김치 사이에 스팸을 하나씩 넣어둔 게 보여서 하나를 집는 순간
"우와. 여기 하나 있는 거 그걸 보고 가져가네!"라고 한다.
"왜? 내가 스팸 먹는 게 아까워?"
"아니. 많이 먹어. 맛있지?"
"응. 맛있게 잘 됐네!"
그리고 또다시 김치 사이에 스팸이 보여서 집어든 순간
"아니 아까 먹었잖아! 왜 두 개 다 가져가는 거야?"
"스팸이 없어? 왜 그래? 줄까?"
"아냐. 됐어! 먹어!"
순간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내가 스팸 두 개 집었는데 집는 족족 입을 대니까 밥 먹기가 싫어. 됐어. 안 먹을래."
그리고 일어나 찜기를 살펴봤다.
급 화가 났다.
그 속에 가득 들어 있는 스팸과 두부와 김치의 양을 보고서는 단전 깊은데 숨은 화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남편의 부모님이 이혼하고 시아버지가 재혼하기 전에 잠시 할머니가 오셔서 돌본 적 있다고 한다.
그때마다 매일 술 먹고 들어오는 아들이 안쓰럽다고, 자식을 버리고 간 며느리를 화냥년으로 욕하면서 손주들에게 화풀이하던 게 할머니 일상이라고 한다.
한창 먹어대는 세 아들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 탐탁지 않아 하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밤늦게 들어오는 시아버지를 위한 밥상은 늘 푸짐하게 한가득이었다고 한다.
저녁이 시원찮아서 아버지 밥상을 보면 침을 삼켜야 했고, 할머니 몰래 고기라도 집어 먹고 나면 엉덩이가 터지도록 맞아야 했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고, 먹는 것 가지고는 치사하게 굴지 않을 자신 있노라 약속했다.
내가!
그러나 그 치사함을 고스란히 남편이 우리에게 드러낸다.
정말 무섭다.
아니 끔찍하다.
그 할머니 돌아가신 지가 수십 년이고, 집에 먹을게 풍족하고 아이들 먹는 거라면 아깝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늘 이상한 할머니의 마음이 튀어나와서 우리 가족을 괴롭힌다.
그럴 때면 한 번도 뵌 적 없는 시할머니가 너무너무 미울 정도다.
한 번도 안 본 할머니를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 있을까 싶을 때, 남편의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남편의 발달사를 알기에 어쩌면 누구보다도 더 이해해 줄 수 있을 텐데 이토록 혐오하는 이유가 뭘까?
왜 한 번도 안 본 할머니를 미워해야 하고, 고스란히 닮은 남편을 못마땅해야 할까?
우리 밥상에 불쑥 나타나는 할머니 영혼과 싸우고 싶은 걸까?
내 마음에 이유를 물어봤다.
단순히 남편이 할머니를 닮아서라는 이유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왜 이토록 화가 나는지를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쩌면 남편의 모습이 내 그림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무심결에 이어가고 있는 습관들.
이 말이 걸린 것이다.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뾰로통해지거나, 화를 내거나, 보복해 버리는 모습이 있다.
그리고는 마음이 넓고 이해심 많고 다 수용한다고 착각하며 나를 속인다.
'나는 그런 적 없어!'라면서 말이다.
남편이 우리에게 자기 할머니의 모습을 보이는 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하면서도 '나는 그런 적 없어!'라고 하는 그 말이 나를 긁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나는 그런 적 없어! 했다면 미안하고!'라며 나의 잘못이나 실수에 관대하게 봐달라고 꼿꼿했지 않았나 싶다.
휴... 나부터 돌아보자.
밥은 앞으로 같이 안 먹어도 우리 가족은 문제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