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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기 전을 기억해.

우리의 신화

by 석은별

"몬냄이 몬냄이... 은별"

"은별?!"

"은별! 어디야?"

"은별 밥 먹어!"

"은별 나 데려다 줄거지?"

"은별 나 사랑해?"

"은별 오늘은 잘 보냈어?"

"내가 은별이 지켜 주려고 불 나라에서 왔다니까!"


나를 지키러 내 배를 빌려 이 땅에 온 녀석.

나를 부를 때 엄마라는 호칭보다 '은별!'이라고 부르는 빈도가 열에 아홉이다.


"야. 엄마라고 불러!"


"시~른~데~ 내가 왜?"


"내가 니 친구냐? 누난 초3부터 엄마한테 존댓말 시작했는데, 넌 나한테 언제 존댓말 할 건데?"


"시~른~데~ 내가 왜?"


"아니. 진지하게 좀 들어라고. 여기가 미국이야 뭐야? 그냥 엄마라고 불러라니까!"


"시~른~데~ 내가 왜?"


삐친 척하면 다시 다가와


"은~별~ 삐졌어? 삐지기 놀이하는 거야? 삐지지 마. 나는 엄마보다 은별이라고 불러야 더 행복해!"


"무슨 행복?"


"나는 이름을 많이 많이 불러 주려고 태어났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불러줄 때 좋은 줄 알아."


".... 이 뚱딴지!"




아들은 초등시절부터 나에게 엄마라고 부르기보다는 이름 두 글자를 또박 불러댔다. 남편이 내 이름을 불러서 따라 부른 건가 물어본다면 '놉!'


어느 날 아들이 자기 정체(?)를 밝힌 이후 장난스럽게 시작한 이름 부르기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아들이 원래 있던 곳은 불의 나라라고 한다. 자신은 불의 나라에서 인간계를 내려다보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용암이 끓으면 물방울을 튀겨 식혀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인간 세상을 구경하던 중 나를 봤는데 자기랑 똑같은 임무를 하는 게 반가워서 내려오기로 했단다.


두세 살 말문이 갓 열렸을 때도 "나는 불 나라에서 왔어! 내가 엄마랑 아빠를 만나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린 줄 알아?"

"불 나라가 뭐 하는 곳이야?"

"응. 거긴 캐나다야. 단풍국이라고 알아?"

(요 꼬맹이가 단풍국을 어찌 알고?)

"단풍국에서 뭐 했어?"

"거기 단풍잎들 내가 다 빨갛게 물들였지!"


그냥 서너 살짜리 꼬마의 환상이려니 했다.


그 내용이 조금 더 커서 확장되더니 불의 나라에서는 빨간색으로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빨간색이 검게 탈 때까지 놓지 않아서 자기와 같은 아이들이 물방울을 튀겨서 검게 되는 걸 막았다고 한다. 제법 이야기가 그럴듯해서 들어주니, 그 환상은 아들의 출생의 비밀이 됐다.


그리고 초등땐 자기가 비록 엄마와 아빠를 선택해서 지구 나이로는 우리보다 어리지만 불 나라의 나이로는 나와 남편은 아기란다.


불 나라에서 불을 지피는 역할이 아니라 불이 활활 타면 식혀주는 역할을 했다는 발상에 왜 나도 자기랑 같은 임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아들의 환상 속에서 나는 얼음과 흙이라고 한다. 때로는 이 흙에 얼음이 너무 많이 올려져 있어서 자기가 내 이름을 직접 불러야 그 얼음이 녹는단다. 얼음이 녹아서 흙에 스며들어야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핀다고 했다. 왜 물이 아니고 얼음이냐고 물으니 "내가 본 건 얼음이니까. 얼음은 이름을 부르면 녹아!"의 단순한 이유다.

뭐가 똑같냐고 물으니 그렇게 나무가 자라고 꽃이 펴야 사람들 마음에 끓는 온도가 내려간다고 했다.


'나중에 동화책 만들면 재미있겠다!'라며 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대가로 나는 몇 년째 엄마라는 호칭보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중이다.


만약 24개월도 안된 아기가 "나는 불나라에서 왔어!"라고 할 때 "헛소리하지 말고!"라고 다그쳤다면 아들의 출생의 비밀은 묻혔겠지?




두 아이를 키우면서 말문이 트이는 시절부터 아이들이 이야기하던 것들을 귀담아 들었다. 다 기억하고 싶었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을 기억할지 모른다고 믿었나 보다. 딸은 세 살 때 이미 자기 동생이 남자라는 것과 강아지가 죽고 나면 동생이 태어난다고 했다. 완벽하게 맞췄다.


나도 어려서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기억이라며 이야기를 풀어놓은 적 있다고 한다. 그러면 할머니도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맞장구를 쳐 주시곤 했다. '아이들이 하는 말은 다 맞아. 아이들이 보는 게 가장 정확해!'라고 했던 대로 내 아이들 이야기를 들었다. 내 기억에서는 사라졌지만 전해 들은 이야기에서 나는 산에 살던 요정이었다. 산을 지키며 그곳에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 주는 역할을 했단다. 할머니에게 털어놓았지만 내 기억에서는 다 사라져 버린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들...


망상이든 환상이든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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