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나는 나에 대해 꽤 잘 안다고 믿었다.
감정은 다룰 줄 알고, 관계는 성숙하게 유지하며, 일상은 충분히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소한 한마디에 눈물이 터지고, 밥상머리에서 얼어붙고, 꿈속에서 울고 있는 나를 마주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나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늘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상처받지 않고, 불편하지 않게, 말을 아끼고, 선을 넘지 않고, 다 이해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했다.
그렇게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표정을 다듬고 말투를 조심하며 살아왔다.
그게 어른스러운 줄 알았다. 그게 성숙한 관계의 방식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내 감정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화가 나도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기고, 서운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질투를 느끼면서도 “나는 그런 사람 아냐”라고 부정했다.
감정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는 법, 그 감정과 공존하는 법을 이제서야 배우고 있다.
이 여정을 쓰면서 나는 수많은 ‘은별이’들을 만났다.
울고 있는 은별이, 참고 있는 은별이, 피하고 있는 은별이, 웃고 있지만 마음이 닫힌 은별이.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안아주는 은별이를 만났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나 자신을 탓하며 보냈는지 모른다.
“왜 이렇게 예민해?”
“왜 혼자만 불편해 해?”
“왜 그것도 못 넘어가?”
“왜 아직도 그걸 기억해?”
그 말들이 내 안의 어린 나를 얼마나 움츠러들게 했는지,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내 감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감정이 나를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이해한다.
분노는 내 경계를 세우게 했고, 슬픔은 나의 잃어버림을 증명했고, 질투는 내 욕망을 알려주었고, 두려움은 나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감정은 나를 흔들던 존재가 아니라, 나를 가리키던 나침반이었다.
나는 이제 감정에게 말한다.
“고마워. 너 때문에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있었어.”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 나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를 몰랐던 날들 덕분에, 지금의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진실한 나로 살아가려 한다.
억지로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고, 모두에게 다정하지 않아도 괜찮고, 가끔은 엉망이어도 괜찮다.
그렇게 살아도 나는 여전히 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었어요?”
나는 대답한다. “살기 위해서요. 내가 나로 살아남기 위해서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감정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면, 그 목소리를 조용히 들어보기를 바란다.
그 안에는 당신이 그동안 감춰온 수많은 자아의 숨결이 고요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도 나를 몰랐던 날들,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나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