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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by 석은별

밤이 깊을수록 가끔은 오래된 기억이 문을 두드린다.

어릴 적의 내가 불쑥 나타나 낯선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꿈을 꿨다.




깊은 회색의 꿈 속에서 작은 아이 하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두 손을 꼭 쥔 채, 입술을 깨물고, 눈을 피하는 아이.

그 아이는 나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거기 있었니?”


아이의 눈동자가 떨렸다.

한참을 망설이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를 싫어할까 봐....”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뚝, 하고 꺾였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나 자신을 외면했을까.

겁이 많던 나, 사소한 말에 쉽게 상처받던 나, 말하지 못해 꾹꾹 눌러 삼키던 나.

그 아이는 내가 부끄러워했던 모든 나였다.


나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너는 아무 잘못 없었는데 내가 너를 자꾸 숨기고, 감추고, 지우려고 했구나.”

“너는 너무 예민하고, 너무 울고, 너무 겁이 많다고 내가 널 탓했었지.”

“그런데 그 모든 게, 사실은 다 너다운 거였어.”


그때의 나는 사랑받고 싶었고, 버려지기 싫었고, 무서웠고, 혼자였고, 도망치고 싶었고, 살고 싶었다.

그 마음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이제서야 말해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아이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앙상한 손.

하지만 내 손 안에서 조금씩 따뜻해지는 손.

그 아이는 내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

나는 숨을 고르며 답했다.

“응, 이제 정말 괜찮아. 우리가 같이 있어줘서.”


나는 이제 그때의 나를 감춰야 할 흠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아이가 있었기에 나는 지금의 나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연약함을 참고, 두려움을 견디고, 말 없이 버텨낸 날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그걸 알아줘야 했다.

그 아이가 먼저 말하기 전에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쥐고 말했다.

“이제 내가 너를 지켜줄게. 다시는 혼자 두지 않을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고마워. 그때 그렇게 살아내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지금의 나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한참을 고민했다.

사실 많이 부끄러웠다.

그 아이를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는 너를 원망한 적 없어.”

그 목소리는 지금의 내게 들리는 유일한 위로였다.

그때의 나, 그 작은 나, 그토록 불완전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나.

살아내고, 버티고, 견디고, 웃으려고 애쓴 나.

그 아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너는 예민하단 말을 듣고도 무너지지 않았지.”

“모두가 괜찮다고 할 때 너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네 마음을 지키기 위해 싸웠잖아.”

“네가 나를 떠나지 않아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어.”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누군가가 처음으로 인정해준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더 강했는지도 모른다.

말없이 버틴다는 건 사실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앞으로의 길이 두렵지 않아?”

내가 물었다.

그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난 늘 두려웠지만 그래도 너라면 괜찮을 거야.”

그 말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과거와 처음으로 화해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토록 내가 외면했던 그 시간들이 내 삶의 가장 단단한 뿌리였다고.

그 시절을 지운다고 내가 완전해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절을 품어줄 때 비로소 나는 나로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잘 버텨왔다’는 말 대신 ‘잘 살아왔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은별아, 정말 수고했어.

그리고 이제, 진짜 너로 살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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