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 이후, 고요 속에서 들리는 존재의 첫 소리
감정은 늘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 버려질 것 같은 슬픔, 화가 난다는 자각, 억울하다는 탄식. 이 감정들이 나를 움직였고, 선택했고, 나의 언어가 되었으며, 때로는 삶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나는 언제나 감정을 열심히 살아냈다. 기쁠 때는 뜨겁게, 아플 때는 무너져내리듯. 그렇게 나는 감정의 언어로 나를 설명하고, 삶을 의미화하며, 존재의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감정이 사라졌다.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상태.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은, 마치 감각이 꺼져버린 듯한 날이 있었다. 나는 그 날, 평소처럼 커피를 내렸고, 식탁을 닦았고, 아이에게 밥을 차렸고, 일을 처리했다. 그 모든 동작에 감정은 없었다. 익숙한 루틴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내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느꼈다.
'이건 무언가 이상한 상태야.'
불안하지도 않은데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텅 빈 진공이 아니었다. 오히려 묘하게 정리된, 고요였다. 처음엔 그것이 낯설었다. 아니, 두려웠다. 마치 내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 내 안의 반응성이 꺼졌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마저 희미해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고요 속에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감정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아주 미세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면의 소음이 아니라, 나의 의식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이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감정의 노이즈에 가려 들리지 않던 '의식의 리듬'이 서서히 귓가에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은 삶의 파도다. 그러나 그 파도가 가라앉고 난 뒤, 바닥에서 깨어나는 것은 '정신의 진동'이다.
나는 그 순간, 나라는 존재가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감정의 파동을 지나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감정을 억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사라진 순간에도 나를 유지하는 법, 아니 오히려 그 순간에 더 정확하게 나를 마주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이 사라졌을 때, 삶은 더 조용하고 단단하게 들린다. 그것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정돈된 상태다. 과잉된 감정이 거둬지고 나면, 내 안에서 정말 필요한 목소리들이 비로소 들린다.
감정은 삶의 언어이고, 의식은 삶의 리듬이다.
그 리듬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나로서 살아내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이제 나는 안다. 감정이 사라졌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삶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는, 정신이 깨어나는 조용한 서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