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소진 이후, 저울로 나아가는 정서적 이탈
나는 오랫동안 감정을 '의무'처럼 느끼며 살아왔다.
슬퍼야 할 자리에선 슬퍼야 했고, 화가 나는 일에는 반드시 화가 나야 했으며, 기쁠 땐 과하게 기뻐야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에게 '느끼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게 아니다'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은 나의 생존 방식이자 정당성이었고, 진실함의 증거였다.
그러나 그 감정들이 삶 전체를 지배하던 어느 시점,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나는 왜 매번 이렇게까지 느껴야 할까?
감정은 왜 항상 나보다 앞서서 달려가는가?
나는 언제쯤, 감정이 아닌 다른 언어로 나를 말할 수 있게 될까?
그 질문은 어느 날 문득 나에게 다가왔다.
감정은 이제 무거웠고, 때로는 불필요한 해설처럼 느껴졌다.
특히 관계에서 반복되는 갈등, 설명되지 않는 억울함, 깊은 슬픔조차도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든 감정을 느껴야만 했고, 거기서 반응해야만 했고, 그래야 '살아 있는 인간'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묻고 싶었다.
“그만 느껴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에는 죄책감이 들었다.
무뎌지는 건 도망치는 거라고 여겼고, 회피하는 나 자신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감정을 덜 느끼는 것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도 나를 볼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감정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감정에게 ‘자리’를 바꿔 앉히기로 했다.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앞좌석이 아니라 조수석으로.
감정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이제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만 느껴도 괜찮아. 너는 이미 충분히 살아 있어."
이 허락은 곧 내면의 공간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감정이 차지하던 자리에 '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각이 자리를 잡았고,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고, 반복이 멈출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삶이 이전보다 낯설게 보였지만, 그 낯섦은 놀랍도록 편안했다.
마치 오래된 집의 가구 배치를 바꾸고 나서야 바람이 새로 드는 느낌처럼.
이제 나는 감정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그 감정들이 나를 삼키지 않도록, 그저 조용히 옆에 앉아 있기를 허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 느껴도 괜찮다는 말은, 이제 내가 나를 다르게 살아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제는 감정이 나를 데려가지 않고,
내가 감정을 데리고 함께 걸어간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정신으로 나아가는 첫 허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