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듯 흐르는 하루

움직이지 않음 속에서 회복되는 내면의 시간

by 석은별

감정이 조용히 물러간 자리에서,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멈춘 것 같기도 한, 정지된 듯한 하루가 이어졌다.

기쁨도 없고, 분노도 없고, 긴장도 없으며, 어느 방향으로도 기울지 않는 감정의 평면 속에서 나는 하루를 살아냈다.


이상하게도 그런 하루는 낯설고도 익숙했다.

감정에 짓눌리지 않으니 몸은 가벼웠고, 마음도 덜 피곤했다.

그러나 동시에 '살고 있다'는 실감은 흐릿해졌고, 무엇을 위해 깨어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런 정적인 하루가 처음 찾아온 것은 아니다.

되짚어 보면, 나는 이런 하루들을 이미 몇 번 살아냈었다.

특히 과거 큰 심리적 사건을 통과한 직후, 예컨대 소중한 사람과의 갈등 이후, 상담실에서 내담자의 깊은 고통을 받아낸 날, 혹은 갑작스러운 상실 앞에 무력해졌던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감정이 멈추는 낯선 정적을 경험했었다.

이번에는 그것이 좀 더 오래 지속되었을 뿐이다.


그 하루는 무감정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내부로 침잠해 있는 시간이었다.

표면엔 고요였지만, 바닥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무엇인가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쫓기 위해, 일부러 아무 일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나서지 않고, 그저 하루를 흘려보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나는 무너지지 않았고,

심지어 '쓸모없는 하루'를 견디는 나 자신에게 어쩐지 애틋한 감정까지 느꼈다.


그날의 나는 커피를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고, 아이가 만든 종이배를 만지작거리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누가 보기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내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삶의 리듬이 재조율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그대로 있어야 하고, 어떤 날은 잠시 멈춰야 하며, 어떤 날은 '흐르는 듯 정지된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 날은 내면의 시간과 외부의 시간이 나란히 흐르지 않기 때문에, 불균형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틈에서, 나의 정신은 가장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안다. 정지된 듯한 하루란, 나를 위한 회복의 시간이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 자신을 정돈하고, 구조를 재배열하고,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도 존재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간의 시간이었다.


감정의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서, 하루는 조용히 나를 가르쳤다.

살아있다는 것은 반드시 격렬한 감정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으며,

정지된 하루도 충분히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멈춘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로 돌아오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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