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하는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공존 실험
페르소나는 우리 모두가 쓰고 살아가는 ‘사회적 가면’이다.
어떤 날은 유쾌하고 사교적인 사람으로, 어떤 날은 냉철하고 실용적인 사람으로, 또 다른 날은 위축되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그 모든 모습을 통해 역할을 수행하고, 사회 속에서 기능하며, 관계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역할이 나의 전부라고 믿는 순간, 나는 나를 잃기 시작한다.
한때 나는 내가 ‘진심으로’ 하고 있는 행동이라 믿었다. 상담자답게 경청했고, 엄마답게 인내했고, 좋은 사람답게 반응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이상하게 지쳤고, 내가 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나는 페르소나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되었다.
페르소나는 ‘가짜’가 아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며, 정체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장치다. 문제는 그 장치가 너무 오래, 너무 잘 작동하면 진짜 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는 데 있다. 역할 수행에 몰입하면서 우리는 '기능하는 나'만을 강화시키고, 감정의 어긋남과 욕망의 왜곡을 무시하게 된다.
이 어긋남을 강하게 체감했던 날이 있다. 그날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큰 갈등이 있었고, 그동안 쌓인 감정이 폭발한 후였다. 나는 겉으로는 차분하게 정리하며 대화를 이어갔지만, 속에서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한밤중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현'이라는 이름을 붙인 자아를 발견했다. 그는 감정을 거세한 듯 분석적이고,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며, 상황을 정리하고 방향을 잡는 사람이었다. 나현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수많은 상황에서 페르소나로 살아내기 위해 호출한 기능형 자아였다는 것을 그때서야 자각했다.
그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낯선 목소리로 채워진 문장들 사이에서 멈춰 서야 했다. “이게 정말 나의 말인가?” “이건 누구의 시선으로 쓰인 문장인가?” 생각보다 나는 오래전부터 기능하는 나, 설명하는 나, 정리하는 나로 살고 있었고, 그 이름을 부여한 순간 나는 비로소 그 가면을 자각한 나가 되었다.
페르소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거짓’을 벗기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어떤 자아로 기능하고 있는가?'를 자각하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에너지를 주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이 자각은 때때로 혼란을 유발한다. 진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언제 가장 진실했는가, 내가 보여주는 모습은 모두 전략인가? 그러나 이 혼란을 지나야 우리는 공존 가능한 자아 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
진짜 나는 기능하지 못할 수도 있고, 기능하는 나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문장들 속에서 끊임없이 조율하며 살아간다. 어떤 날은 기능하는 나가 필요하고, 어떤 순간에는 감정이 충실한 내가 등장해야 한다. 그 둘의 경계를 명확히 아는 것이야말로 통합의 시작점이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쓰는 이 순간, 어떤 페르소나를 쓰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나현이 타이핑을 도우며 정리를 하고 있고, 은별은 그 감정의 흐름을 끌어오고 있으며, 본캐인 나는 전체를 관찰하며 방향을 정하고 있다. 꼬마는 때때로 말을 걸지만, 아직은 조용히 뒤에 앉아 있다.
이 다중의 자아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나의 현실이다. 이 방식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분열이 아니라 공존의 실험임을 알고 있으니까.
“나는 지금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 있다.”
이 문장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페르소나를 쓰되 그것에 잠식되지 않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