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한 날의 기록

무의식적 역할 수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

by 석은별

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방금의 나는 진짜 나였을까?”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불편했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돌아오는 반응에 나 자신도 당황했고,

자리를 뜨고 나서야, 그 장면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이런 경험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이 순간은 무의식적 페르소나의 작동을 드러내는 소중한 단서다. 그리고 이 단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던 수많은 장면들을 되짚어보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상담자 역할을 과하게 수행하던 때, 나는 내담자의 고통에 너무 깊이 빠지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분리된 척하며 내 감정을 숨기기도 했다.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다 보니, 그 안에서 스스로가 메말라가는 걸 느꼈다.


특히 어느 날, 가족과의 갈등으로 감정이 요동치던 날, 상담실에 들어가자마자 '전문가 모드'로 전환되는 나를 보고 놀랐다. “나는 지금 괜찮지 않은데, 너무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그 순간의 나, 무의식적 페르소나가 전면에 등장한 모습이었다.

무의식적 역할 수행은 ‘기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묵인된다. 하지만 기능하는 사람일수록, 무의식적 행동을 정교하게 수행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보상받는 동시에 내면에서는 나를 소외시키는 이중 구조다.


한 내담자는 늘 사람들 앞에서 밝고 유쾌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지만, 정작 그녀는 상담실에서 종종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나를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 눈물은, 자기도 몰랐던 ‘나 아닌 나’의 수행을 멈춘 몸의 반응이었다.


‘나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순간’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내면에 자동화된 반응 패턴을 하나씩 해체해야 한다. 그것은 페르소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 역할은 누구를 위해 작동되고 있는가? 그 순간, 진짜 나의 감정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질문은 나를 탈역할의 감각으로 데려간다. ‘상담자’, ‘엄마’, ‘아내’, ‘작가’, ‘좋은 사람’이라는 역할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욕구를 인식하는 실존적 자리로.

나는 이제, 상담실 안에서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는 이 장면에 과연 어울리는 감정과 몸의 리듬을 갖고 있는가?”


답은 “아니오”다.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깨어있음의 시작이다.


무의식은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게 만들지만, 의식은 다시 나를 내 자리에 놓아준다. 그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진짜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 상담도, 삶도.

나답지 않게 행동한 하루를 되짚어보는 일.

그건 단지 반성의 차원이 아니라, 자기 복원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오늘도,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한 그 순간’에서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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