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역할이 사라졌다

Part 7. 퇴직 후 60대 남성

by 석은별

인물 소개와 에피소드 배경


이름: 정호(가명) / 64세 / 전직 대기업 관리자

정호는 오랜 시간 ‘팀장님’, ‘부장님’, ‘아빠’, ‘여보’라는 역할로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이름에는 항상 누군가의 필요와 요청, 기대가 따라붙었다. 퇴직 후, 회의 요청도, 자녀들의 질문도, 아내의 간단한 부탁도 줄어들자 그는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 날, 휴대폰 연락처를 정리하다 예전 직함이 붙은 자기 번호를 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누구로 불릴까?”

역할이 아닌 나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 낯설지만 이제는 배워야 할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막막함을 감정일기로 풀어보기로 했다.




1. 어떤 일이 있었나요?

스마트폰 연락처를 정리하다가 내 번호가 ‘정호 부장’으로 저장돼 있는 것을 봤다. 나 자신이, 내 번호를 직함과 함께 저장해둔 거였다. 그 순간 좀 멍해졌다. 이제는 누구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걸까?


2. 기록 전 주요 감정 백분율

정체성 혼란 30%

무가치감 25%

허전함 20%

존재불안 15%

외로움 10%

3. 무슨 생각이 떠올랐나요?

회사 다닐 땐 항상 역할이 먼저였다.
보고받고, 지시하고, 책임지고, 평가하고. 그 역할은 분명히 피곤했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줬다.

퇴직 후, 누군가 나를 “정호 씨”라고 부르면 어색하다. 심지어 아내도, 자식들도 요즘은 대화를 길게 하지 않는다. 이제는 누구도 나에게 뭘 맡기거나 부탁하지 않는다. 처음엔 편했지만, 요즘은 공허하다.
역할이 사라지자, 이름도 잊히는 느낌이다. 나는 그동안, 내 이름 없이도 잘 살았던 걸까?


4. 활용한 기법은 무엇인가요?

역할과 정체성의 분리 시도: ‘나는 역할이었나, 사람인가’에 대한 인식

감정 명명 및 구조화: 공허함과 혼란, 불안을 분리해서 바라보기

자기 호명 시도: 잊힌 자기 이름을 복원하려는 첫 자각


5. 새로운 생각은 무엇인가요?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의 요청에 반응하는 존재로 살아왔구나. 그러다 보니, 역할이 사라지니 나도 함께 사라진 기분이 드는 거다. 하지만 역할이 없어졌다고 해서 내가 없어진 건 아니다. 이제는 외부의 요청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정호야.”
익숙하지 않지만, 그렇게 한 번 불러보았다. 그 이름에 새로운 감정이 스며들기를 바란다.

6. 도움이 된 점은 무엇인가요?

지금껏 ‘이름’이 아니라 ‘호칭’으로 불려왔다는 사실을 정확히 자각하게 됐다.
그걸 잃고 나서야, 나의 본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오늘 일기를 쓰며, 처음으로 나를 나로서 호명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새로웠다.

7. 나에게 어떤 긍정적인 말을 하면 좋을까요?

“역할이 아닌 너의 이름에도 삶이 있다.”

“이제부터 너는 누군가의 요청이 아니라, 너의 목소리로 살아가면 돼.”

“사라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만나지 못했던 너를 이제야 만나려는 중이야.”

8. 기록 후 주요 감정 백분율

자기이해 30%

여운감 25%

회복감 20%

담담함 15%

여전히 남은 혼란 10%

9. 일기 쓰기 전과 후의 변화

처음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하는 상실감이 컸다. 하지만 일기를 쓰면서 깨달았다. 나는 단지 역할이 사라진 거지, 정호라는 사람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이제야 나는 이름 없는 삶에서 이름 있는 존재로, 다시 걸음을 떼고 있다.

오늘은 그 출발선 앞에 조용히 서 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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