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녹음기가 멈추다.
'크면 고모님께 효도해라.'
'요즘 세상에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 없다. 늬들이 잘해야 된다.'
'너희는 복도 많지. 고모, 고모부께 항시 감사한 마음으로 살거라.'
고속버스 안에서건 기차 안에서건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헤어질 때 나와 동생에게 했던 인사말이다.
방학이면 시간을 내어 따로 사는 남동생을 만나기 위해 고모와 함께 먼 길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나선 길은 길면 3박 4일 짧게는 1박 2일 만에 돌아와야 한다. 대부분은 1박 2일 만에 와야 되지만 딱 한번 고모부의 허락을 받아 3박 4일을 지낸 적도 있다. 차라리 1박만 하는 게 나을 뻔했다.
그 동행길이 서너 번쯤이었을 때 '이건 좀 이상해!'라는 반항심이 올라왔다.
'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내 사연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거지? 왜 처음 본 사람들은 고모 말만 듣고서 우리에게 잘해라고 하는 거지? 뭘 안다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천 원짜리를 용돈이라며 쥐어 주기도 한다.
그럼 그 돈은 고모가 가져간다.
'여비에 보태자.'
'은수한테 과자 사 먹으라고 준거잖아!'
'처음 본 늬들이 좋아서 준거겠냐.'
나와 고모 눈치를 보는 동생은 고모의 손에 돈을 건넨다.
'앞으로 첨 보는 사람한테 우리 얘기하지 마! 나 그럼 앞으로 고모랑 안 다녀!'
'언니... 왜 그래? 고모한테 잘하라고 하셨잖아!'
'야! 첨 보는 사람들이 뭔데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냐고. 고모말만 듣고 뭘 안다고? 우리가 불쌍해? 불쌍하냐고? 그럼 고아원에 데려다주던가!'
터미널에서부터 언성이 높아지자 택시를 골라서 얼른 올라타게 한다.
'넌 눈치란게 없냐? 남사시럽게 사람 많은 데서 그 소리를 지르고... 쯧쯧쯧'
'첨 보는 사람한테 남의 가정사 이야기 다 하는 건 그건?! 이제 그만하라고! 여기 택시 아저씨한테도 해보지? 우리 아빠 죽고 고아원에 갈 뻔한 조카들 자기가 거두면서 산다고 자기 신세 불쌍하다고 대단하다고 칭찬받아 보시지?'
여동생이 눈물을 뚝뚝 흘린다.
'야! 네가 뭔데 울어. 네가 울면 내가 입 다물어야 돼? 넌 왜 고모편만 드냐고! 이런 식이면 차라리 고아원 가는 게 나아! 너 정신 똑바로 차려. 고모가 자기 잘난 척하려고 우리 데리고 사는 거야. 우리가 사는 거 다 정부에서 지원도 해주는 거고, 고모가 우리 때문에 돈 쓰는 거? 그런 거 없어! 다 아빠 보험금도 있고. 우린 우리끼리 살아도 되는 거야! 똑바로 알라고!'
택시 안에서 질러대는 소리에 다들 조용하다. 고모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서는 입술만 삐죽삐죽 대며
'저거 저거 할매가 살아 있으면서 너무 기를 살려놨어. 쯧쯧쯧'
'할매가 뭐! 할매가 뭘 어쨌다고!'
이렇게나 대들었지만 고모의 하소연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고모집에서 독립하겠다고 소란을 피웠고, 작은집에서 학대당하던 남동생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만 살게 해달라고 구청에 가서 매달렸다.
30년 전의 나는 그랬다. 다들 나를 고모에게 무례하게 덤비는 싸가지 없고 은혜도 모르는 아이로 봤다.
그 시절에는 막도장을 파서 서류를 위조하기도 쉬웠고, 연극하기도 쉬웠다. 고모의 만행에 가담하면서 챙기게 한 돈과 여러 상황들을 떠올리면 나는 더 똑 부러져야 했고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야만 했다.
출가외인이 친정집 조카를 거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안다.
그러나 그 과정엔 사람마다 다른 경험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잘 안다. 그 당시 어린이재단이라는 이름이던 지금의 초록우산을 통해 소년소녀가장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이 몇 있었다. 당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지저분하고 쓰러져가는 집에 살더라도 할머니와 오순도순 사는 자매가 있던 집이었다. 할머니가 손수 해 주시는 따뜻한 밥과 손녀들의 마음을 걱정해 주면서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원망하지 않도록 일러주는 그 이야기에 부러움이 일어났다.
반면 나는 경제적으로는 고모집이 부유했을지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전쟁통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긴장감으로 예민한 사춘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고모가 조카를 거두는 희생을 선택하게 되면서 나와 동생은 엄마가 버리고 간 아이들, 아빠가 술 주정뱅이에 사고만 치던 사람, 특히 나는 태어나 한 달도 안돼서 엄마가 버린 아이가 되어야 했다. 고아원에 갖다 버릴 수 있는 아이들을 남편을 설득해서 지켜낸 고모를 주변에서는 '좋은 사람', '드문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고모를 그렇게 못된 사람으로 만들 의도는 없다.
그녀도 그녀의 삶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유일하게 자존을 지키는 방법이었을 테니...
그러나 미성숙한 그녀의 태도 덕분에 나의 방어력은 최강이 되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