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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결혼식

그럼에도 필요한 엄마

by 석은별 Feb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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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여동생의 결혼식이었다.

'혼주석에 그분이 오신대?'

'응. 해 주신대.'

'다행이네.'

나는 여동생의 입장에서 남동생이 죽음으로 사라지면서 친엄마의 생존을 확인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결혼에 대해 극도로 거부하던 아이가 결혼할 결심을 했다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다. 다행스러워한 것만 사실이다.




가족사가 많이 복잡해서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는다. 이야기해야 될 자리에서는 허심탄회하게 밝히기 때문에 때로는 듣는 사람들이 되려 미안해하기도 한다. 어쩌겠나.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부모도 아니고, 내가 만든 가족사도 아닌데...

여동생과 나는 엄마가 다르다. 3남매 중에 내가 맏이고 두 동생들과는 엄마가 다르다.

2년 전 남동생의 죽음을 그토록 아파했던 이유 중 하나가 내가 그 녀석을 밀어내서 마음 둘 곳을 못 찾고 힘들어했던 건가 싶어 안타까웠다. 그러나 내가 보호해야 될 나이를 훌쩍 넘은 성인을 내 품에 계속 끼고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곤욕이었다. 이미 나는 초등 6학년 때 아빠가 돌아가시던 그날 내 엄마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동생들을 선택했다. 겨우 초등학생인 나의 미성숙한 선택이지만 다시 되돌린다 해도 그 선택은 또 할 것 같다. 내 엄마에게 두 동생들과 함께 받아주지 않는다면 같이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바람에 엄마는 나에게 삐쳐서 한동안 연락을 끊었고, 나는 나대로 동생들을 책임진다는 이유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 고모 집에서 함께 살다가 독립했다가 엄마와 화해 등등 여러 복잡 다한 경험 끝에 내 가정을 이루면서 나만의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늘 외가 식구들이 있었고, 내 눈에는 동생들이 안쓰러웠다. 새엄마가 가출한 이후 호적에 주민번호가 뜨지 않는 것을 보고 죽었구나 싶었다(나중에 알아보니 전산화 누락이란다). 그렇게 고인으로 알고 지내다 2년 전 남동생 죽음으로 새엄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는 사망신고 과정에서 서류 때문에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가 자주 생긴다. 여동생은 친엄마가 살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재회했고, 세 살 때 집 나간 엄마를 30년이 훨씬 넘어서야 만나다 보니 쉽사리 정을 못 붙인다. 동생에게 자신의 친엄마를 원망하지 말도록, 새엄마한테 아빠가 나쁜 놈이었다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유일하게 모든 기억을 다 갖고 있기에 고모가 씌워 놓은 프레임을 벗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엄마가 동생에게 자기를 변명하기보다는 내가 이야기해 주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고, 다행스럽게도 나의 기억과 새엄마의 기억도 일치했다.


제야 내 마음에도  먹구름이 다 걷히는 기분이다. 나는 나대로 내 삶이 안정의 길로 가고 있듯, 동생도 자신의 해묵은 감정을 하나 둘 해결하고 결혼을 결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물론 결혼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도로 거부하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마음을 돌리고 오랜 연인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게 된 것.. 누군가를 신뢰해도 된다는 결심... 그 장면이 의미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동생은 분명 잘 살 거라 믿는다. 결혼식장을 가기 전까지는 그 믿음 뿐이었다.


아들은 내게 말한다. '엄마는 가족이 다양하네~'

그러게나 말이다!




여동생은 친엄마를 30년 이상 못 봤다. 그 아이 살 때 가출했고, 어린 나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는 그녀가 제발 집을 나가길 밤마다 빌었다. 자세한 것은 언젠가 다시 언급되겠지.

크면서 내 가정사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두 동생들을 그냥 내 친엄마의 자식들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나를 걱정한 것인지 그 아이들 입장을 걱정한 것인지는 모른다. 그냥 내 엄마의 자식들이자 내 친동생들로 컸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급작스럽게 철이 드는 것은 거의 본능인 것 같다. 13살짜리가 의미 부여한 가족이라는 뜻은 그게 최선이었다.



그러다 여동생 결혼식 날 가슴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아팠다.

물론 형식이기는 하지만 30년 넘게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사람에게 신랑 신부가 인사한다.

'신부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사회자의 멘트 중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에서 화가 났다. 그제야 원망이 툭 튀어나온다. 도대체 뭐 한다고 30년 넘게 단 한 번도 안 나타난 것인가. 그렇게나 많은 형제들을 뒀으면서 조카들이 궁금하지도 않았었나? 문득 내 엄마와 외가 식구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화가 났다. '우리가 얼마나 잘했는데!'


신랑 신부의 인사와 동시에 딸은


'엄마. 이거 좀 아닌 것 같아요. 한 번도 안 나타났으면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해 보이고... 이모를 길러 주셨다니... 너무 이상해요!'라고 한다. 내 동생 결혼식이라고 참석해 준 친구 역시 중학교 때부터의 내 삶을 다 지켜본 시선에서 날 걱정한다. 친척 몇몇도 나를 살핀다.


그래 좀 이상한 결혼식이 맞다. 마치 내 동생 결혼식이 아니라 지인의 결혼식에 온 기분인 데다, 신부 측에 앉아 있는 낯선 사람들을 보자니 더더욱 이질감이 느껴졌다. 사정을 다 아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지금 무슨 쇼를 하는 거냐.'라는 말이 나왔고 '그렇게라도 하는 신부도 마음이 안 좋을 거야.'라고 하는 말에 이를 악 물었다.


'그렇게라도 했어야 되는 거구나. 네가 바라는 평범이라는 것이...'

결혼식 마친 후유증이 꽤 컸다.

남편은 '우린 그저 병풍이야. 신랑 신부에게 병풍이 되어 주는 게 최선인 무대였다고 생각해.'라고 한다.

동생의 입장에서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풀리는 거라면... 이해한다.


30년 만에 재회해서 결혼식장 혼주로 앉기까지 겨우 4번을 만난 사이에 '길러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해야 되는 무대가 충격 그 자체였다.



더욱 화가 난 것은 새엄마가 나에게 '와줘서 고맙다.'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30년 만에 본 자리였다.

몇 안 되지만 멀리서 온 우리 일가친척들은 어쩌란 것인지... 30년 넘게 생존 여부도 모르게 살아 놓고서는 맨몸으로 결혼식장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형식이란 것이 참 무섭다는 생각과 함께 지금 이 상황을 나만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건가 싶어 어질했다.


도대체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인 건지...

다음날 친구랑 통화하면서 펑펑 울었다.

무엇에 대한 설움인지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억울함과 괘씸함이 뒤엉킨 데다 불쌍하고 슬픈 감정도 떠오른다.


그러다 여태 내 입장에서만 살아온 흐름만 보다가 세 살에 친엄마를 잃은 여동생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뭔가 늘 허전하고 결핍이었던 마음이 무엇인지 느끼자 너무 아팠다. 전기고문이 있으면 이런 느낌인 걸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찌릿찌릿 아팠다. 내가 기억하는 여동생의 삶이 너무 기구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감정이 있는지 고스란히 느끼자 '그 결혼식은 그렇게라도 했어야 했네... 연극처럼 한판 놀고 나면 큰 숙제가 끝나는 것일 테니까... 그게 그 아이가 원하는 평범한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네.'라고 말이 나온다.

이원성을 인식하는 순간 순식간에 정리되는 무언가가 있다. '앎'이다. 상대의 입장과 나의 입장, 또는 본질적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와 겉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야 하는 상황...

'아... 이젠 더 이상 이해 못 할 것이 없겠다. 그건 그랬어야만 했던 거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며칠 전 아들과 등교하는 길에 내 어린 시절을 잠시 이야기 들려주면서

'아빠가 죽고 나서 엄마가 다른 동생들은 고아원에 보낸다 하고 너만 친엄마한테 가라고 했다면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라고 물으니


'그냥 같이 산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였어? 혼자만 친엄마한테 가면 동생들이 보고 싶을 거잖아. 무조건 같이 산다고 해야지!'라고 하는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나도 그랬어.'

어른들의 개입에 막아선 것은 열 세 살의 나였다.

그리고 긴 투쟁 끝에 동생들을 내 엄마와 살게 한 것도 나였다.


어쩌면 동생의 결혼식은 나도 모르게 타인들의 관계에 개입한 내 모습의 끝을 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와 타인의 사이에 개입하는 또 다른 타인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다고 열 세 살로 돌아가면 동생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나만 친엄마한테 가겠냐고 묻는다면 '아니. 그때랑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 비록 그 결혼식을 다시 본다고 하더라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새엄마나 그 가족들이 동생들의 안부를 물으러 왔다거나 찾으려는 시도라도 했다면 내 개입이 방해가 되었겠지만, 30년 넘도록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갑자기 나타나 키워 준 사람들로 둔갑해 버렸다.

'형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비록 씁쓸하지만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멘트일 뿐이다.

남편 말대로 병풍이 되어주는 연극 무대였던 것이고, 그 형식은 그렇게라도 했어야만 되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고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내가 당연하게 누리고 행동하던 것들이 내 동생 입장에서는 부러움과 시기심과 질투가 유발되는 행동이었음을 이제 와 깨달았다. 그 아이에게는 잘 대해주던 엄마나 내가 든든한 백이 되기보다는 위협스럽게 느껴졌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 이상한 결혼식에서 나나 일가친척들의 황당함은 정상적인 감정이었다.

그 이상한 결혼식을 치러야 했던 동생의 입장도 정상적인 태도였다.

그 이상한 결혼식에서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덕분에 내가 잘 살아 있고, 잘 살아 냈고, 나답게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한 것.

내 정신을 잘 붙잡아 주는 남편과 내 상황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아이들과 친구로부터 받은 위로...

어쩌면 가장 안전하게 동생과 나 사이가 분리되어 각자가 된 자리가 아닐까 싶다.




중학생 때였다. 초등학생이던 여동생이

'언니! 엄마는 언제 와?'

'누구? 우리 엄마? 너희 엄마?'

무심결에 던진 '너희 엄마'라는 물음이 그 아이 가슴에 콕 박혀 버렸고 '아. 언니와 나는 엄마가 다르지'라는 것이 깊은 상처가 됐다고 한다. '중학생 때의 나는 도대체 왜 그런 실수를 한 걸까?' 무심결이라고 하지만 나부터 엄마에 대한 분리가 분명했고, 그것이 특권처럼 인식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내 행동에서 여전히 튀어나오는 이상한 당당함... 자연스럽게 누리던 것이 몸에 배었다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마무리해 본다.



며칠에 걸린 글이...

다 쓰고 나니 억울함과 괘씸함이 물러나고 미안함과 고마움이 떠오르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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