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팬시용품 점주
책상 한가득 채워져 있는 필기용품을 보면서
'이거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다 쓰지도 못하겠다!'라는 말이 나왔다.
평소 필기를 많이 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필기용품을 보니 결핍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밥에 집착하는 남편을 뭐라 할게 아니다.
나는 필기용품에 집착하면서 남편과 같은 심리적 구조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문득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내 앞에 있는 이 많은 물건들도 나와 함께 사라지겠구나 싶었다.
미니멀리스트는 나라는 존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나는 잘 버리는 습관이 있으면서 예외를 둔 것들이 바로 필기용품들이다.
색연필부터 각종 펜과 아기자기한 볼펜들을 한가득 채워 놓고 산다.
가만히 보면 즐겨 쓰는 건 한 두 가지 모델인데, 문구점에서 예뻐 보이는 필기류를 보면 굿즈 대하듯 꼭 수집해 온다. 어떤 것은 볼펜 심지가 떨어지지 않은 채 몇 년간 연필꽂이에 꽂혀 있기도 하고, 어떤 것은 말라서 나오지 않기도 한다. 나오지 않는 건 버릴 명분이 있기 때문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만, 잉크가 마르지 않는 한 오래됐다고 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왜 이렇게 필기용품에 대해서만큼은 집착이 줄어들지 않을까?
지금까지 찾은 이유로는 내 마음에서 놓아주지 못하는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남편이 집밥에 대해 '대접받는 자신'과 연결 지어 인식하듯, 나는 필기용품에 대해 '공부하는 자신'과 연결 지으려고 드는 것 같다. 한창 장래희망을 찾고 미래를 꿈꿔야 되는 10대에는 오히려 생존을 위해서만 고민했어야 했고, 정작 꿈을 갖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결혼 이후에 아이들을 키우면 서다. 그때 손에 들어온 필기구들이 쌓여가면 뭔가 내 업적과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필기하다 잉크가 닳으면 기분이 좋았다. 늘 여분 심지를 넉넉히 들고 다녔고, 언제 잉크가 떨어지더라도 조마조마하지 않았다. 뒤늦게 공부에 빠지면서 학창 시절을 재연할 수 있어 마음이 편했는지도 모른다. 그걸 나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었던 게 필기구에 대한 집착이구나.
그렇다고 이 집착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때문에 미니멀리스트는 못되겠다. 대신 기회가 된다면 오히려 팬시용품점을 차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내가 다 쓰지 않더라도 나처럼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탐낼 만한 물건들을 팔고 싶다.
한쪽에서는 책을 읽고, 한쪽에서는 한정판 팬시용품을 판매하는 그런 곳을 꾸며 놓고, 주방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나오는 그런 곳을 만들어봐야겠다.
월세 내지 않는 가게를 구하는 게 먼저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