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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열리다

나 기억상실이었나 봐

by 석은별

태어난 곳은 다른 지역이지만 내 기억 안에서는 거의 한 곳에서만 자랐다. 100프로 토박이인 셈이다.

그럼에도 길 찾기에 대해서는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여기며 길치로 살았다.


하지만 나는 걸어서 다니는 길은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훤하게 안다.

이 부분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 채 수십 년 살았다.


그리고 얼마 전 그 장벽이 무너졌다.


네비를 따라가던 중 눈으로 그냥 봐도 한 블록 더 가서 좌회전해야 될 길인데 나를 이상한 길로 안내한다. 혹시 뒷문이 있나 싶어 네비를 믿고 갔지만 눈으로 본 그 신호등이 맞았다. 막다른 길에 들어서 돌아 나오기 위해 골목을 따라 들어갔다.


"아! 여기는 아빠가 죽기 전까지 살던 동네네."





브런치에 용기내기 시작해서일까, 내가 많이 단단해졌기 때문일까, 갑자기 나타난 그 동네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하고 처절하게 살았던 곳이다. 희한한 것은 그곳이 개발도 덜 되어서 예전 모습이 드문드문 발견된다.


'내가 저기 저 산을 누비고 다녔지, 저 골목이 누가 살던 곳이더라?'


질문과 동시에 모든 게 다 기억이 났다.


이럴 수가!

공간지각능력이 떨어진다고 믿어야 이 장소를 내 기억에서 밀어 낼 수 있었던 것이구나!

누군가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는 순간을 목격 하는 일이 많았지만 내 기억이 이렇게 갑자기 떠오르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다시 생각하니 내가 이곳에 출근하기로 결정된 이후 지도도 살펴봤고, 정문과 후문도 살펴봤고, 어떤 주차장이 본 건물과 가까울지 살펴봤다. 길치라는 취약성 때문에 꼼꼼하게 살펴봤다. 주변 도로는 물론 집까지의 동선을 살펴봤다.

지도로만 볼 때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살던 동네라는 것을.

철저하게 연결 짓지 않았다.


만약 떠올랐다면 나는 어땠을까?


출근을 포기하지는 않았겠지만 복잡한 심경으로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떠오르지 않게 한 것이 나름 나를 보호한 방법이었던가?




잘못 들어온 김에 그 동네를 더 돌아봤다. 첫날이라 일부러 일찍 나왔기 때문에 한 바퀴 정도는 더 돌아도 여유로울 것 같았다. 살금살금 차를 몰고 운전하면서 살펴보니 꽤 많이 변했지만, 골목들의 흔적은 여전했다.


그리고 알게 된 또 다른 왜곡은 내가 이곳에 살았던 흔적을 다른 동네에서 살았던 흔적과 섞어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종 산으로 들로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초등학교 5~6학년때의 기억을 갖고 더 어린 2~3학년 때 할머니가 살아계시던 시절의 동네에서의 기억으로 믹스해 버렸던 것이다.


'이게 기억 상실증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지워버리고 살 수가 있었던 거지?


신기한 것은 기억이 돌아오면 두통이 밀려온다거나 갑자기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거나 하는 드라마에서나 보는 그런 증상이 없었다.

그냥 지금의 내가 동네를 찬찬히 둘러보면서 오류를 찾아낼 뿐이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떠오른다고?'


첫 출근을 잘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녹초가 됐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악몽을 꿀 것 같아.'라고 중얼거리며 잠들었고 실제로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다 나타날 정도로 엉망진창인 꿈을 꿨다.


자주 자각몽을 꾸기 때문에 꿈에서도 알았다.

이 꿈을 다 꾸고 깨면 시원해질 것이라는 것을...


꿈에서 나는 바빴다.

뒤집힌 카드들이 아무리 애써도 들춰지지 않더니 자각몽임을 알게 된 순간 한 번에 그 패들이 다 뒤집혀서 그림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한꺼번에 그림을 보여주는 패들을 살펴보면서 일사불란하게 순서를 맞추고 방향을 다시 틀어서 정리하느라 바빴다.


기억이 열리고 나니 한편으로는 허전하고 한편으로는 후련하다.


이젠 '그때_거기'에 잘 놓아줄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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