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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는 눈빛이 따뜻해졌다

있는 그대로 보니 지금 여기더라

by 석은별

잊힌 기억이 다 떠오르고 나서 생긴 변화 중 하나가 길눈이 밝아졌다.

머릿속에서 공간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느낌을 알게 됐다.


잘못 들어섰던 길에서 아빠와 살았던 마지막 동네를 마주했고, 그전부터 살풀이하듯 마음을 다 후벼 파내고 있어서인지 정작 그 동네가 다 떠올라도 덤덤했다.

물론 그날 밤에는 곯아떨어지듯 잠을 잤고, 살면서 만난 사람들이 다 나타나서 번잡했다. 하지만 더 이상 떨리지 않았고,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됐고, 사람들의 눈빛을 의식하지 않아도 됐다. 늘 저 하늘에서 감시하던 옵서버도 따라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원래 그들이 다 있었지만 그곳만 불이 들어오지 않아서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착각했다가 불이 들어오니 모든 사람들이 아무 일 없듯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 장면들이 낯설기보다는 나 역시 그들처럼 살아내고 있다는 게 받아들여졌다.


오랫동안 내 기억에서 삭제된 줄 알았던 많은 장면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속에서 도망치거나 악을 쓴다거나 괜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다거나 구석에만 있지 않았다.


컬러가 골고루 입혀지고 세월만 흘렀을 뿐이다.


그 와중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드디어 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하다. 뭘 하든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있는 그대로 본다. 어떤 생각도 감정도 의도도 추측하려 들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안하다.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이 감동을 남편에게 바로 전했다.


"나 드디어 길이 한눈에 다 들어와! 그리고 전에는 누가 길을 말로 설명하면 눈만 껌뻑껌뻑 거리면서 몰래 길 찾기로 위성사진 보면서 익혔다면, 이번에는 말로 설명하는데 그게 머리에 선명하게 그려졌어!"


"원래 그러는 거 아냐?"


"아니! 나한테는 이런 일이 첨이라고! 내 머릿속에서는 그런 기능이 작동을 안 했었다니까!"


"그래서 신났어? 기분이 좋아?"


"당연하지! 내가 못하는 게 줄었잖아. 갈수록 내가 못하는 게 더 많아질 줄 알았는데, 나 못하는 게 줄었어!"




꽤 오랜 시간을 힘들어했다.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길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단순히 길을 잃은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도 그 부분이 속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은 채 살았다.

우연히 잘못 들어선 길에서 갑자기 길을 인식하는 영역에 불이 켜진 것처럼 환해졌다. 꽤 신기한 경험이다.


내가 길에 대해 두려워한 여러 이유 중에는 삶의 목적과 방향이 선명해지면 내가 묻고 있는 기억들을 들춰야 한다는 두려움이 연합됐던 게 아닌가 싶다. 반대로 기억이 되살아나니 내가 가고 있는 삶의 목적과 방향이 꽤 진지하고 잘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지나 온 시절들이 컬러빛으로 물들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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