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했다.
스무 살 초반의 싱그러움을 온전히 경험하기도 전에 대부분 시간 동안 병간호를 했다.
고모부가 돌아가신 뒤 고모는 거의 매일 사우나에서 살았다. 사우나 마치면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는 게 낛이라고 했다. 엄마는 종종 나에게 고모가 걱정되니 자주 연락해 보라고 한다. 자식 없이 혼자되면 너무 외롭고 쓸쓸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고모에게 앙금이 쌓이는 데는 엄마의 역할도 한몫했다. 늘 죄인이라는 마음으로 "잘해드려라."라고 했기에 그 말은 이슬비처럼 내 정신에도 세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업 마치고 학과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전화가 울린다. 당시에는 시티폰을 썼을 때였는데 발신자 표시 서비스가 되기 전이었다. 친구의 전화인 줄 알고 받았더니 고모의 목소리다.
"은별아. 여기 좀 와 줄래? 내가 몸이 좀 이상해. 앞이 빙글빙글 돌고..."
"뭐야? 또 술 마셨어?"
"아니 오늘은 술 안 마셨다. 사우나하고 나오는 길인데..."
"그래서 어딘데?"
"여기가 어디더라?.... 여보세요? 여기 아주머니께서 길에 앉아 계시는데 술이 취하신 건지 못 일어나시네요!"
"네? 거기가 어디죠?"
고모와 통화 중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니 뭔가 불길했다. 그 남자분에게 위치를 물어서 택시 타고 갔더니 고모가 가방에서 짐을 꺼내서 만지작하면서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여기서 뭐 해!"
"어.. 왔나?" 말과 동시에 픽 쓰러진다. 아무래도 그전까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응급차를 불렀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연락할 곳을 찾아야 되는데 너무 떨린다.
나에게 보호자냐고 묻길래 조카라고 했다. 자녀는 없냐고 묻는다. 고모에게 자녀? 자녀가 있지. 고모부랑 재혼했기 때문에 고모 나이만 한 자녀들이 있다. 고모 폰에 저장된 번호는 나랑 울 엄마 집 번호였다. 고모 가방을 뒤져보니 작은 수첩이 나왔다. 일일이 번호를 눌러서 통화했던 고모였다. 수첩에 적힌 번호로 전화했다.
"저 은별인데요... 고모가 쓰러져서 OO병원 응급실이에요. 보호자를 찾아서요."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고모부 아들이 오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사랑 이야기하고 급한 검사를 하는데 뇌출혈로 수술을 해야 된다고 한다. 고모부 아들은 더 큰 병원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지역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 원장이 어린 시절 친구라고 한다. 그곳이 더 안전하다.
고모부 아들이 나타나니 병원에서 고모를 대하는 태도도 사뭇 달라진다.
그런 일은 다반사였다.
그렇게 고모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수술을 했고 중환자실을 거쳐 VIP병실에 입원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인은 다 고모부 아들이 했다면 나머지는 내 차지였다. 고모집에 가서 짐을 정리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입원물품을 사고 병원에서 밤을 새우는 것들이 다 내 차지였다. 물론 첫날에는 엄마도 이모들도 친가 쪽 친척들도 다녀갔지만 그 중심엔 내가 있어야 했다.
수술 후유증으로 오른쪽 편마비가 온 고모는 평생 반신불구로 살아야 했다.
건강한 몸이 망가지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그 사이 고모의 정신도 온전치 않아 나만 보면 욕을 했다. 내가 자기 돈을 다 갖고 갔다는 둥, 아빠를 잡아먹었다는 둥, 할머니가 살아생전 내 걱정만 하다가 가서 불쌍하다는 둥... 자기가 딸인데 자식보다도 손녀를 더 애지중지하는 할머니라서 못 댔게 한 게 미안하다는 둥, 나만 아니면 할머니한테 호강시켜 줄 수 있었는데 못했다고 한이 맺혔다는 둥...
나에게 그 빚을 다 자신에게 갚으라면서 병시중을 들라고 했다.
VIP병실에 입원할 때 병원비를 걱정하면서 나한테 욕을 하던 고모의 그 눈빛이 생생하다. 고모부 아들이 병원비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신세 지는 것은 너무나도 못할 짓이라며 끝내 다인실로 옮겨달라고 고집을 피웠다.
VIP실에 있으면 간호사들이 다 해줄 텐데 왜 조카를 고생시키려고 하느냐는 말에 고모는 내가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 비위를 못 맞춰도 내가 그 비위를 잘 맞춘다면서 걱정 말라고 했다.
(아. 글 쓰다 보니 진짜 욕 나오네)
그래도 수시로 내 안부를 물어 봐 주고 틈틈이 용돈을 챙겨주는 고모부 아들 덕에 아르바이트하는 셈으로 쳤다. 그들이 그렇게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형편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만한 위치까지 오르는 데는 인격도 어느 정도 성숙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는 괜찮은 어른의 모습을 보게 된 계기도 됐으니...
다시 고모 이야기로 돌아가 수술한 병원에서는 퇴원을 해서 요양병원으로 옮기면서 내게 했던 말이 있다.
"저쪽 병원에 가면 거기서는 그냥 내 딸이라고 해라."
"왜?"
"그냥 암말 말고 딸이라고 해. 조카 부려먹는다고 옆에서 얼마나 난리들인지..."
"내가 왜? 엄마 버젓이 놔두고 왜?"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어눌한 말로 또박또박 버럭 하던 고모 표정과 목소리가 생생하다.
속에 뭘 잘 담지 못하는 나는 그대로 엄마한테 고자질했다. 엄마는 나에게 고모한테 잘하라고 한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불려 다닐 줄은 몰랐다고 요양병원 옮기고 나면 내 학업에 집중하라고 했다. 자기가 말해 본다고.
그렇게 요양병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의료진이 묻는 보호자에는 고모부 아들이 다 처리했지만 병실로 들어가자 고모는 나를 자기 딸이라고 한다.
"이쪽은 우리 딸이에요."
인상이 구겨지는 나를 나만 봤을까?
요양병원으로 옮긴 후에는 엄마 말대로 병원에 매일 가지 않았다. 그전에는 보호자 침대에서 항상 잠을 자도록 해서 간병인 역할을 했다면 그 요양병원에서는 보호자가 밤에 잘 수 없다고 하니 좋았다.
고모는 내가 병원에 자주 못 가니 내 동생들을 부르다가 결국 퇴원하겠다고 대성통곡하며 고모부 아들을 불렀다.
"내가 실컷 친정식구들 돌봤더니 이제 병신 됐다고 거뜰떠 보지도 않는다. 천벌 받을 년들!"이라며 나와 엄마를 욕하며 퇴원을 했다.
"퇴원하시면 집에 사람 불러다 드릴 테니까 그렇게 하세요."라고 했지만 고모부 아들이 보내 준 아주머니한테 돈 얼마 받기로 했냐. 그 돈 받고 이렇게 밖에 못하냐고 다그쳐서 아주머니가 못 오겠다고 했단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그냥 여기서 확 뛰어내려서 죽어버려야 너희들이 편하지? 그래 이제 내가 없어져 줄게!" 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불안한 마음에 고모집으로 달려갔더니 식탁 의자를 거실까지 어떻게 끌고 갔는지 가운데 놓여 있다. 편마비라 미처 그 의자를 베란다까지 혼자 끌고 가기에는 무리였나 보다. 옆에는 빈 소주병과 먹다 남은 회가 있고 고모는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나 진짜 못해먹겠어! 나 고모 때문에 정말 못살겠어!"
엄마한테 전화했다.
"고모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도대체 왜 저러나 몰라. 나한테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내 목구멍을 도저히 통과 못할 것 같았던 고모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그 말을 내뱉은 후 내도록 죄책감으로 남아 고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20대 초반에 나를 아는 친구들은 "또 고모한테가?"라고 늘 물었다. 마치고 술을 마신다거나 놀다가도 고모 전화를 받으면 심부름을 해야 했다. 뭘 사 오라거나 와서 치워라거나 하는 것들...
내 지인들에게는 "고모가 자녀가 없어서... 고모부랑 사시다 고모부 돌아가시고는 혼자라서 우리 가족이 많이 챙기는 거야."라고 했다. 그래야 내가 가는 게 합당한 설명으로 들릴 것 같았다.
그때 한 친구가 말했다.
"너네 가족이 너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은 뭐 하고?"
"그러게 내 동생들은 아직 중학생이고 고등학생이라서, 엄마도 멀리 있는데 엄마랑 고모가 그다지 안 친해."
"야! 너도 학생이야. 낼모레 시험도 있고. 과제도 산더미잖아!"
살면서 종종 그 친구가 나를 직면시킨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그 친구라도 이상하게 봐줘서 참 다행이지 않았나? 그때 내 친가 쪽 어른들은 다들 내가 고모를 잘 보살펴야 된다고 했고 그걸 가장 못마땅해한 것은 내 엄마였지만 나는 어쩐지 그런 엄마에게 화만 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