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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캠퍼스씨네이십일 Jun 19. 2017

야간열차를 탔다


시험기간에는 새벽이 깊어질수록 딴생각에 빠지기 쉽다.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도 역시나 내가 앉은 책상을 제외한 모든 곳을 상상하며 활기찬 새벽을 보냈다.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있는 곳을 상상했고, 시험만 끝나면 그중 한곳을 꼭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덕에 중간고사는 망해버렸고, 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기로 했다. 나의 시험공부와 맞바꾼 상상 속의 새벽을 찾아가기로. 이것이 내가 야간열차를 탄 이유다.     

용의자의 야간열차

사실 유럽의 야간열차인 ‘유로나이트’를 타고 싶었으나, 학기 중인 대학생 신분으로서는 그럴 시간도, 돈도 없었다. 내게는 단지 중간고사가 끝났다는 홀가분한 마음속에 월요일이 공강이라는 여유뿐이었다. 월요일 아침이었고 당장 떠나기로 했다. 오늘이 아니면 야간열차는 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다른 도시로 떠나서 서울로 오는 야간열차를 타자. 

선정의 기준을 서울에서부터 가장 먼 곳으로 정했다. 부산에서 타는 청량리행 열차와 여수에서 타는 용산행 열차가 있다. 마침 2년 전 내일로를 이용해 갔던 여수의 밤공기가 그리웠고, 바다도 볼 겸 여수에서 시작하는 용산행 야간열차를 타기로 했다. 아침에 여수로 가서 여행을 하고 밤에 서울로 오는 기차를 타는 일정이다. 

용산행 무궁화호 야간열차는 여수의 적막을 뚫고 출발했다. 사람들이 적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다. 아니면 내가 탄 3호차에만 사람이 많은 건가? 출발할 때까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로 꽤나 시끌벅적하다. 곧 조용해지길 바라며 이어폰을 꽂고, 최근에 나온 맥 드마르코의 《This Old Dog》 앨범을 틀고,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생각해봤다. 기차는 여수엑스포역에서 23:20에 출발해 용산역에 04:20에 도착한다. 딱 5시간이다. 유럽의 야간열차에 비해 짧은 시간이지만 대한민국 내에서는 가장 긴 구간이다. 

이렇게 오래 기차나 버스를 타본 적이 없어서 긴 시간을 함께할 준비물들을 이것저것 챙겨봤다. 야간열차에 로망을 갖게 해준 다와다 요코의 <용의자의 야간열차>와 수업 과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챙긴 노트북, 그리고 야간열차의 분위기를 담아줄 DSLR. 여기에 평소 기차나 버스를 탄다면 챙기지 않았을 양치도구와 목베개, 그리고 잠을 쫓으려고 챙긴 건지 잠을 맞이하려고 챙긴 건지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잘 구분이 가지 않았던 포켓용 보드카. 

적당한 시기에 꺼내서 잘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용산까지 몇번이나 역에 멈추는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대충 15개 정도 되는 거 같다.     


고요는 어디에

첫 번째 역인 여천역을 지나 두 번째 역인 순천역에 도착하니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이 꽤 있다. 출발부터 시끄럽게 떠들던 내 옆의 커플이 이 역에서 내렸다. 이제 좀 조용해지겠구나라는 착각도 잠시, 저 멀리서부터 시끌벅적한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3호차 객실 문이 열리면서 거나하게 취한 중년 남성 다섯명이 들어왔다. 창문 밖은 어둠처럼 고요한데 객실 안은 아직도 시끌벅적하다. 언제쯤 기차 안도 조용하게 잠들까. 

잡생각은 그만하고 노트북을 꺼내 수업 과제를 하기로 했다. 학기 초부터 배운 내용들을 요약하고 느낀 점을 쓰는 과제다. 학기 초반 수업 내용을 되짚어보다가 이번 학기도 종강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의 대학생 신분은 이번 학기를 끝으로 사라지게 된다. 한달 후면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 취준생? 백수? 그냥 학생이라고 하고 싶다. 휴학을 몇번 했더니 학생이라는 신분을 남들보다 꽤 오래 누렸다. 그럼에도 나의 학생 신분을 이대로 보내기 아깝다. 아니, 아직 어디로 사라져야 하는지 모르겠는지도 모른다. 이어폰에서는 마지막 곡인 <Watching Him Fade Away>가 흐르고 있었다. 

과제를 끝내니 열차는 구례구역과 곡성역, 남원역 그리고 오수역을 지나 전주역에 도착했다. 어느새 새벽 1시1분이었다. 사람들이 대부분 잠들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다. 내가 책상 앞에서 상상하던 고요한 야간열차의 분위기였다. 과제도 끝낸 만큼 아까부터 아껴온 보드카를 까기로 했다.     


유럽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것

포켓용 보드카는 생각보다 양이 적어서 다음 역인 익산역에 도착할 때쯤 다 먹고 없었다. 너무 아쉬워서 다음엔 좀더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술을 가지고 타는 사람이 많았는데 왜 그런지 그때 정확히 이해가 됐다. 다들 도착할 때까지 한숨 푹 자고 싶은 마음이겠지. 조용해진 객실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은 거의 다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각자 자세가 다 달랐다. 곧은 자세로 똑바로 앉아 자는 사람, 고개를 좌석 뒤까지 넘어가게 걸치고 자는 사람, 비어 있는 옆자리에 누워 발을 창에 올리고 자는 사람까지. 불편해 보이지만 다들 꽤 잘 잔다. 

논산역에 도착한 새벽 1시44분의 기차는 열심히 달리는 바퀴의 마찰음만 존재했다. 책을 꺼낸 것도 그때였다. 나의 한국 버전 야간열차와 유럽 버전인 소설 속 야간열차를 비교할 겸. 읽다보니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 유럽의 야간열차는 침실칸과 씻을 수 있는 샤워실이 있다는 것. 문득 불편한 좌석에 자신에게 편한 자세를 취하며 자고 있는 나의 야간열차 동승객들이 조금 안쓰럽게 보였다. 두 번째, 유럽에는 조식이 있다는 것. 내가 탄 야간열차는 매점 운영이 마감되어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자판기의 음료뿐이었다. 사실 이쯤 되니 조금 허기가 지기 시작했고 ‘한국 야간열차에도 조식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는 샌드위치라도 챙겨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두시가 넘어가니 조금씩 졸음이 왔다. 드디어 목베개를 쓸 때가 온 거다. 

새벽 2시46분 서대전역을 지나 조치원역에 도착할 때쯤 3호차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승무원 때문에 잠에서 깼다. 승무원이 왜 나의 승차권을 확인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아까 과제를 마치고 앞, 뒤, 옆 좌석이 비어 있는 자리로 옮겨 앉았는데 말이다. 더구나 열차가 출발할 때부터 승무원들은 적잖이 객실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바리바리 챙겨온 나의 짐을 확인할 뿐이다. ‘내가 무임승차하게 생기진 않았나?’라고 생각하다가 귀찮게 승차권을 꺼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사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깬 이유도 이런 불안 때문이다. 검표도 검표지만, 누군가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찾아와 자신의 자리니까 비켜달라고 하면 어쩌나, 나의 과제들은 물론, 중요한 정보가 다 들어 있는 노트북을 누가 훔쳐가면 어쩌나. 기차가 탈선되면 어쩌나라는 생각까지…. 이런저런 생각에 종착지까지 깊이 잠들 수 없었다. 책상 앞에 앉아 낯선 곳을 상상할 때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빨리 내 책상이 보고 싶어졌다. 아까부터 창문에 발을 올리고 코까지 골며 자는 아저씨가 대단해 보였다. 

천안역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탔고 평택역, 수원역, 영등포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연달아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니까 아직 어두운 새벽임에도 활기가 찼다. 이제 나의 종착지인 마지막 역만 남겨놓았다. 출발할 때는 빛의 굴절로 물결이 활기차게 보이던 한강이 도토리묵처럼 차분해 보인다. 허기진 배에서 아까부터 천둥이 치고 있다.     


유럽야간열차는 이렇다던데.........

6분의 알리바이

6분 지연된 야간열차는 4시26분에 용산역에 도착했다. 낯익은 풍경이 새삼 반갑게 느껴진다. 처음 타본 야간열차는 생각보다 훨씬 유익했다. 특별히 야간열차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사람들의 행동이나, 새벽이 깊어갈수록 변모하는 나의 심리상태가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다와다 요코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낯섦을 느끼면 더이상 많은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지 않고 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낯선 곳을 지나며 내가 당연시 여겼던 것들을 곰곰이 생각했더니 멈춰 있던 욕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은 대학생으로서의 시간을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 아직 타닥타닥 타고 있는 남은 젊음의 열정을 불살라봐야겠다. 물론 불을 댕기기 전에, 우선 집에서 한숨 자야겠다. 이제 잠이 몰려온다.


글·사진 김영빈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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