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세이] 산책하는 마음(3)
“세상이 혼란스럽고 망가진 곳처럼 보이고 암담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 나는 집에서 나와 나무들이 있는 곳까지 5분 동안 걸었다."
얼마 전에 <야생의 위로>(에마 미첼)라는 책에서 읽다가 밑줄을 그어둔 구절이다. 요즘 급박하게 요동치는 탄핵정국의 뉴스를 따라가느라 온종일 넋놓고 있기 쉬운 내게 약이 되는 문장이겠다 싶어서였다. 더욱이 오늘처럼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고 칼바람이 부는 날엔 온라인 세상에 나를 묶어두는 마우스를 내려놓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마저 결심하기를 미루게 된다. 그런 때 다른 건 몰라도 저 문장을 떠올려보자, 문장이 얘기하는 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딱 5분만 걷다가 오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한 그루라도 보고 오자, 하여 밑줄을 진하게 쳐뒀는데, 다행히 효과 있었다.
일단 바깥으로 나갔더니, 얼음장 품은 칼바람이 불안하고 암울한 뉴스로 과부화에 걸린 머릿속에다 시원하고 상쾌한 박하를 뿌려주는 것 같아서 계속 나아가게 됐다. 어느새 내 발걸음은 삐삐, 삐삐빅 새소리가 들리는 산 아래에 도착했다. 때때로 된바람이 불어오긴 했지만, 따스한 오후의 햇빛이 남아있는 시간이라 예상보다 춥지 않았으므로 걷는 내내 기분이 환했다.
지난 일요일에 구로올레길에 왔을 때는 땅이 냉기로 얼어서 단단하기만 했었는데, 엊그제 내린 폭설로 산길이 물기로 질척이거나 여태 녹지 못한 눈으로 빙판이 돼 있었다. 추운 날씨에, 길은 빙판이 돼버린 사정에 산책 나온 이가 아주 드물었다. 덕분에, 잠깐이지만 고요하고 한적한 나 홀로 겨울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여느 날보다 새소리가 더 크고 명징하게 들렸다. 연이어 들리는 새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걸음을 옮겼더니 곧이어 샛빨간 작은 열매가 흩뿌려진 곳에 당도했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보니까, 바싹 마른 가지에 자잘한 빨간 전구 같은 점들이 달려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열매가 달려있다니 놀랍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거기 나뭇가지를 잿빛 세떼들이 빨간 열매를 찾아서 분주하게 오가며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다.
새들의 생김새를 찬찬히 살펴봤다. 멧비둘기처럼 깃털이 잿빛이지만, 그보다 옅고 몸통이 가름하고 움직임이 날렵한 걸 보아 직박구리 무리임에 분명했다. 카메라로 확대해 새의 얼굴을 찍다가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두뺨의 갈색 반점은 언제 봐도 새색의 연지곤지처럼 사랑스러워 보였다. 자연의 미감은 의아할 정도로 창의적이어서 새의 뺨에 어떻게 저런 고운 반점까지 생기도록 했는지 신기했다.
이토록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얼고 말라붙은 엄동설한에 대체 산짐승들은 무얼 먹고 지내나 늘 궁금했는데, 그때 평소의 의문이 풀렸던 순간이었다. 역시나 자연의 순리는 의아할 정도로 정교한 것이어서, 적어도 멸망의 순간이 온 게 아니라면, 어떤 생명이든 먹여살리도록 잘 구조화된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엔 요즘 세상살이가 지극히 불안하고 끔찍히 암담해 보이지만, 오늘 다녀왔던 산책 덕분에 어쩌면 지금 우리들 또한 이 혹한의 시절을 어떻게든 건너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의 순리가 흘러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밝아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