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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친구가 될 것 같은 두근거리는 설렘

[그림에세이] 산책하는 마음(5)

by 안이다

오늘도 가파른 언덕길로 산을 올랐다. 숨이 거칠어지며 서늘한 산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가슴 중앙에 알싸한 솔향 같은 게 퍼지는 기분이었는데, 폐가 씻겨진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했다. 어수선한 일정과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시 미루고 산책을 나오길 잘 했다 싶은 순간이었다.


몇 년째 매달 참석하는 모임이 있는데, 모임날이 다가오면 마음이 더 없이 무거워진다. 거기 모임에 참석하면 착잡해져서 집에 돌아오고, 참석하지 않으면 소심하고 태만한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모임 참석의 의미나 보람이야 있겠지만, 어쩐 일인지 재미나 즐거움을 한 조각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몇 해 동안 비슷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이제는 그 모임과 나의 관계를 깊이 재고할 시간이 온 게 아닌가 한다. 어쩌면 그래도 모임에 가는 게 의미나 도움이 된다는 것도, 내가 억지로 붙들고 있는 모임참석의 이유가 아닐까 싶은 때도 많았다. 거기 소속이라도 아니면 나는 세상의 낙오자나 외톨이라는 증명이 되고 말 거라는, 밑도끝도 두려움 때문에 여태 그 모임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따라 이런 마음이 커지는 걸 보아하니, 이제 어느 쪽이든 방향을 정할 때가 온 건가 보다. 적어도, 내가 거기 모임에 열심히 다니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감이 잡혔다.


오르막 끝에 다다랐더니, 정상에 꽤 넓은 평지가 나타났다. 푸른 인조잔디가 깔린 축구장과 누런 흙이 깔린 운동장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표지판에 따르면 거기 바로 아래가 주민들이 이용하는 수돗물 저장고인 신정배수지라고 한다. 어떻게 물 저장고 위에다 커다란 운동장을 조성할 생각을 했을까 신기하기도 의아스럽기도 하고, 내가 지금 물 위의 허방을 걷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라니 괜스레 불안해졌다. 쓸데없는 걱정인 줄 알면서도, 사서 걱정하고, 사서 고민하고, 사서 괴로워하는 소심한 내 성향이 문득 도드라지게 자각돼 헛웃음이 났다.


자자, 걱정은 내려놓고 그만 걷는 데 집중하자. 공원 정상에 올라왔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급경사 계단으로 내려왔더니 평소에 다니던 올레길이 나왔다. 아하, 길이 이렇게 서로 연결됐구나, 머릿속이 반짝 지도가 그려졌다.


계단에서 산길로 진입하는 곳에 커다란 나무가 하나 서 있는 게 보였다. 올레길 산책을 할 때 종종 지나치던 나무였는데, 오늘은 이렇게 가까이 다가섰으니 나무와 눈인사라도 하자 싶어서 나무 앞에 섰다. 지금은 한겨울이므로, 나무는 아무런 이파리를 달지 않고 맨 가지로 우뚝 서 있어서 무슨 나무인지 도통 알기 어려웠다. 설령 잎이 무성하더라도 나무에 무지한 내가 어떤 나무인지 알 리가 없겠는데, 다행히 나무는 <졸참나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참나무 중에서 잎과 열매가 가장 작아서 졸병 참나무라고 불리다 졸참나무가 되었다니, 나도 참 졸병스러운 삶을 사는데 나무에게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며 감정이입이 됐다. 거기서 몇 발자국을 걸어가니까 비슷하게 생긴 또 다른 나무들도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게 보였다.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 이런 나무들은 확실히 졸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졸참나무 보다 크기나 폭이 넓은 게 느껴졌다. 역시나 한겨울의 나무들이라 그런지, 모두 이파리가 없었기에 그들의 차이나 특징이 어떤 건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내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건 나무 수피결이나 무늬가 다른 정도였는데, 나무에 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게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같은 참나무 계열이어서 그런지, 한참을 들여다봐도 다 거기서 거기 같았다.


그러다 순간 든 의문이 있었는데, 나는 나무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싶었다. 참나무라는 말만 들었지, 그게 어떤 나무인지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적이 놀랐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늘 알고 싶었지만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서 막막하기만 했던 나무 공부를 이참에 시작해볼까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 참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일단 검색부터 했다.


아하, 밤이 열리는 나무를 밤나무라고 하듯이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참나무라고 하구나, 나무 중에 쓰임새가 너무나 많아서 진짜 참다운 나무라고 참나무라고 불리고 있구나,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한 지식에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조금만 찾아보면 될 것을, 그동안 늘 산책길에서 마주치던 참나무에게 내가 이리도 무심하고 게을렀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아까 내가 보기엔 다 비슷비슷해 보이던 참나무들의 수피들을 그려보면 조금이라도 차이나 특징이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서 스케치북에 한 그루씩 담아보기 시작했다. 그림으로 그려보니까, 아직은 어설프고 어렴풋하지만 각각 나무의 차이가 느껴지긴 했다.


문득 가슴이 두근댔다. 어쩌면 앞으로 나무와 친구가 될 것 같았고, 이런 작업이 내가 한동안 잃어버렸던 일상의 재미와 즐거움을 한껏 안겨줄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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