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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엔 쉽게 즐거워지는 사람이 될 결심

[그림에세이] 산책하는 마음(7)

by 안이다

설날이 지나고 첫 산책을 나왔다. 집을 나서기까지 한나절이 걸렸다. 굳이 오늘 가야 할까 하는 망설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갖은 변명을 피어 올렸다. 그저께 폭설이 내려서 산길이 미끄러울 건데, 설 연휴 동안 분주했고 몸도 마음도 피곤한데, 오늘 처리할 일이 첩첩이 쌓였는데…… 오늘은 건너뛰고 내일 꼭 다녀와야지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즈음에 무심코 날씨앱을 열어봤다. 앞으로 일주일 내내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의 날씨가 예보됐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내일부턴 나가고 싶어도 나가기 어렵겠구나. 역시나 한겨울에 산책 나갈 만한 온화한 날은 며칠되지 않구나. 머릿속을 먼지처럼 부유하던 변명거리가 한 번에 가라앉았다. 곧장 나갈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예상대로 그저께 폭설이 산길을 빙판, 아니면 진창으로 만들어놨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을 지날 때 수차례 미끄러질 뻔했다. 그런데도 오늘 굳이 산책을 나온 게 후회가 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굳었던 머릿속 근육이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았는데, 그건 뇌가 안도의 한숨을 비로소 쉬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늘 반복되는 패턴이지만, 워낙 집순이 성향이라 나오기 전까지 한참 망설이고 굼뜨게 행동하다가 일단 나오면 쉽게 즐거워지는 편인가 보다.


나처럼 설날 이후 첫 산책을 나온 사람이 많아 보였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 나온 이들이 유난히 자주 보였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와서 신이 나고 흥이 넘치는 반려견의 날쌔고 급한 발걸음을 견주들이 뒤따르며 철벅철벅한 진창에서 균형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광경에 싱긋 웃음이 났다. 여지없이 강아지들 엉덩이에, 견주들 종아리에 진득하고 까만 진흙이 묻어있어서 또한 배시시 웃음이 났다. 오늘 여기로 산책 나온 견주들은 강아지 목욕뿐만 아니라 입고 나온 바지나 운동화도 필히 세탁해야겠구나 싶었다. 지금 이 순간, 집으로 돌아가면 목욕하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천진난만한 강아지들은 알까? 머릿속으로 강아지들이 목욕할 때 털로 부푼 몸피가 물에 젖어 바짝 쪼그러든, 애처로우면서도 웃기고도 귀여운 장면들이 그려졌고, 연이어 미소가 지어졌다.


엄동설한 사이에 잠시 빼꼼 고개를 내민 잠깐의 봄날 같은 따스한 날씨여서 그런지 산에 사는 새들도 평소보다 꽤 많이 보였다. 어느 큰나무 가지에 까치와 까마귀가 무심하고도 평화롭게 함께 앉아있는 장면을 발견하고, 저 두 종족의 새들은 서로 영역 다툼하지 않나 의아했다가 햇볕이 잘 드는 데 자리잡은 나무니까 다툴 마음 같은 것도 녹아내리는 곳인가 싶었다.


까치와 까마귀가 나란히 앉아있는 광경이 신기하고 좋아서 그들 모습을 사진에 몇 컷 담고서 산 아래 구립도서관으로 향했다. 1층에 마련된 그림책 서가에서 눈에 띄는 책 하나를 골라서 펼쳤는데, 마침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에밀리엔은 집에 가는 길에 조금 높은 곳으로 난 작은 오솔길로 들어섰어요. 실바니아네 집을 지날 때, 실바니아는 왁스로 가구를 문질러 윤을 내고 있었어요. 에밀리엔은 처음으로 조금 화가 났어요. 커튼을 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주고 있으니까요.”

- 키티 클라우더, <대혼란> 중에서


책에서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들'과 '죄책감'이라는 글귀가 도드라져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몰라도 뭔가 하지 않으면, 어떤 걸 가지지 못하면, 누군가 되지 않으면, 단순하게 기분좋은 상태로 전환되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미루는 게 습관이 돼 버렸다. 새해엔 단순하고 쉬운 사람이 되자고, 거창한 행복까지 가지 않더라도 일단 쉽게 즐거워지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 또한 어느 날 반드시 해야할 일이 되어 부담감이나 죄책감이라는 무게로 마음의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메모하거나 사진으로 남기지 않고 책장을 덮었다. 대신에 5분이라도 더 따스한 햇빛 아래 걷고 싶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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