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세이] 산책하는 마음(9)
내가 서 있는 산책로에서 불과 몇 십 미터 떨어졌을 뿐인데, 그곳은 전혀 다른 세상처럼 지극히 차갑고 적막하고 한가로워 보였다.
길고 가냘픈 두 다리로 얼음 위로 사뿐사뿐 걷는 큰 새의 유려한 자태에 이끌려 카메라를 든 순간부터 내가 숨을 죽이고 있는 줄도 몰랐다. 렌즈 너머 왜가리의 우아한 움직임에 사로잡혀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카메라를 끄며 뒤늦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느낀 고요한 몰입감이 조금 전까지 마음 속에 어수선하게 둥둥 떠다니든 부유물을 조용히 가라앉혀 놓았음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을 만난 날이면, 누구도 내게 의도적으로 나쁜 말을 하거나 무례하게 대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집에 돌아와 보면 마음 여기저기에 긁힌 상처를 발견하고는 착잡한 기분에 젖어든다. 내가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라 그런 거겠지, 분명 즐겁게 어울렸던 순간도 많았고, 별문제 없이 잘 지냈다고 스스로 다독여 보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기운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밤새 뒤척이며 답답한 마음을 앓다가, 조금이라도 기분 전환을 해보려는 생각에 일부러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며 먼 거리에 있는 국수 맛집을 찾아가 점심을 먹었다.
“아참, 여기 근처에 호수공원이 있지!”
“그러네. 호수 한 바퀴 돌다 갈까?”
걸어서 10분도 채 안 돼 우리는 서서울호수공원에 도착했고, 호수 얼음 위를 유유히 걷는 하얗고 커다란 왜가리를 바라보며 조용한 구경꾼이 되었다. 단지 한 대상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뭉클해질 수 있다니, 내게는 낯설고도 놀라운 경험인데다 밤새 뒤척이며 답답함으로 앓게 했던 가슴 속의 이물질이 어느 순간 사라진 듯 잊혀졌다. 호수공원에 하얗고 커다란 새가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새는 내게 위로가 되었기에 깊이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일렁였다. 사람들이 왜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진 힘을 이야기하는지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우연한 산책 덕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젯밤 내내 눅진한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른 빨래처럼 뽀송하게 개운해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숨 죽이고 있는 줄도 모를 만큼 몰입하며 촬영했던 왜가리의 아름다움 자태를 꺼내보다가 문득 작년에 읽었던 인상적인 구절이 생각나 책장에서 그 책을 찾아 다시 펼쳤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자연의 존재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단순하다. 자연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가치를 되찾게 해주고, 우리를 자신의 에너지로 채워주고, 걱정과 내적 갈등을 잠시 중단시켜 준다. 자연은 감동을 주어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행복감을 높여준다. 그렇다. 우리가 자연과 접촉할 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했을 때 숨이 멈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 미셸 르 방 키앵, <자연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