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세이] 산책하는 마음(11)
며칠 만에 나선 산책길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겨울산의 공기가 박하향 같다면, 봄산의 공기는 달짝지근한 꿀향이 감도는 듯하다.
봄, 희망, 안정, 평화 같은 것들은 단번에 오는 법이 없는 모양이다. 달력상으로 봄이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진눈깨비가 안개처럼 세상을 휘감고 있었다. 그러다 일주일쯤 지나서야 먹구름이 걷히고 환한 햇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께까지 쏟아지던 진눈깨비가 산책길 곳곳을 진흙으로 만들었지만, 그 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들며 조금씩 제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보였다.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산책객을 만난 날이었다. 겨울 동안 보이지 않던 맨발걷기족도 심심찮게 마주쳤고, 겨울산에서는 듣지 못했던 색다른 새소리도 들렸다.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봄이 왔다는 감각을 넘어서, 어쩌면 이제 세상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산책을 마친 뒤, 지난주에 빌렸던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들렀다. 바깥의 활기와는 달리 실내는 조용했다. 방학이 끝난 아이들은 학교에 갔을 테고, 어른들은 나처럼 햇빛을 따라 산책에 나선 모양이었다.
책 반납대에서 누군가 방금 반납하고 간 그림책 <페퍼와 나>를 발견했다. 지난달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이라 다시 한번 펼쳐보고 싶어졌다.
두 번째로 읽어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지난번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 속 아이는 길에서 넘어져 무릎에 커다란 딱지가 생긴다. 처음에는 그 상처가 흉측하고 불편해 몹시 싫어하지만, 친구들의 몸 어딘가에도 비슷한 딱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딱지를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아이는 그 상처에 페퍼라는 이름을 붙이고 친구가 되며,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성장해 간다.
책을 덮으며 문득 떠올랐다. 나는 내 딱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최근에는 기억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며 내 안에서 앓고 있던 문제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의외로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품이 넓고 지혜로웠다. 그리고 조급해하는 나를 다독여줬다.
"아까 너도 생각했잖아. 봄이 한순간에 오지는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