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세이] 산책하는 마음(13)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아직 겨울빛을 머금은 암갈색 가지들 사이로 연둣빛 새순들이 고요히 솟아 있다. 차가운 계절을 뚫고 올라온 여린 생명의 행렬 앞에서 마음 한켠이 잔잔히 흔들린다. 풀과 꽃들은 어김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시간을 따라 와주었건만, 인간 세상의 시간은 오히려 거꾸로 흐르는 듯하다. 따스한 봄빛과는 어울리지 않게, 주변에는 어둡고 스산한 과거로 되돌아가는 기운이 짙게 감돌고, 그 탓에 반가움 속에서도 씁쓸하고 암담한 마음이 더 도드라진다.
토요일 한낮, 온갖 불길한 소식이 이어지는 뉴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케치 도구가 든 배낭을 메고 바깥으로 나섰다. 느지막이 집을 나선 터라 멀리 갈 수는 없을 것 같았고, 가까운 곳에서 고요하고 한적하게 걷다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광화문 시내로 갈 때면 늘 영등포에서 여의도로 이어지는 서울교를 거쳐 가기 마련인데, 그 다리 아래로 펼쳐진 싱그러운 숲 같은 풍경이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언젠가 한 번쯤 가보고 싶었지만, 영화 <김씨 표류기> 속 배경처럼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자연 보호구역 ‘밤섬’ 같은 곳이 아닐까 싶어 그저 상상만 하며 오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 그곳을 산책하는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곳은 바로 1997년부터 생태 보존과 보호를 위해 조성되어 운영되고 있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이라는 공간이었다. 집에서 버스 한 번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건만, 나는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서울교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걸까. 이번에도 나 자신의 게으름과 무관심에 뜨악한 마음이 들었다.
신길역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샛강다리 아래로 향하자, 서울 한복판이 맞나 싶을 만큼 울창하고 싱그러운 원시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또 한 번 놀랐다. 이곳은 도시 속 쉼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벤치나 가로등, 편의점 하나 없이 오롯이 생태의 보존과 보호에 충실한 공간이었다. 그 사실이 더욱 반갑고 인상 깊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치들이 풀밭을 유유히 거닐며 이따금 풀을 쪼아대고, 걷다 보면 오렌지빛 햇살을 조잘조잘 튕겨내는 호수도 심심찮게 나타났다. 흙길은 유난히 단정하고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맨발로 걷는 이들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공원에 들어섰을 때는 멋진 공간에 감격한 마음으로 들떠 걷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자연이 주는 고요와 평온 속에서 지난 며칠간 머릿속을 떠다니던 걱정과 불안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연둣빛이 번져가는 풀과 나무에 둘러싸인, 한가로운 산책자가 되었다.
오랜만에 그림 도구를 챙겨 나온 김에 간단하게 어반 스케치를 해볼까 싶어, 간이 의자를 펼칠 자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원에는 일반적인 긴 벤치가 없었지만, 한 사람쯤은 앉을 수 있을 만한 잘려나간 나무 밑동이 간간이 보여, 그 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잠시 스케치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맞은편 시냇물과 길, 흙계단을 그리던 중이었다. 그때, 강아지 유모차를 끌고 지나던 할머니 한 분이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넘어지면서도 유모차를 꽉 붙들고 있었고, 그 덕분에 강아지는 시냇물로 떨어질 뻔한 위기를 면했다. 다행히 유모차 안에 있던 강아지는 무사했고, 근처에 있던 산책객들이 일제히 달려와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고,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며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고, 강아지의 상태까지 세심하게 챙겼다.
다만 아쉬운 건, 할머니의 휴대폰이 어딘가로 날아가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혹시 시냇물에 빠졌을까 싶어, 사람들은 하나둘 물가에 쪼그려 앉아 햇살을 반짝이며 흐르는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따뜻하고 포근한 광경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요즘 우리 사이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연둣빛 새순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고요히 돋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울과 무력감으로 무거웠던 마음 한가운데로 봄빛이 스며드는 듯해, 문득 안도감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