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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도 시샘할 다정한 봄소풍

[그림에세이] 산첵하는 마음(14)

by 안이다
<서서울호수공원 산책 1> 혼합재료, 16절, 2025년 3월

얼마 전, 3월 초봄의 폭설이 한바탕 쏟아졌기에 이제는 겨울이 다 지나갔겠거니 방심했다. 쨍한 햇빛을 조잘조잘 튕겨내는 호수, 바람 따라 흔들리며 군무를 추는 억새풀과 노란 개나리를 바라보며 홀가분한 산책을 즐겼다.


그런데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사이, 나는 외투 지퍼를 목 끝까지 끌어올리고 시야를 가릴 만큼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예상치 못한 얼얼한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걷고 있었다. 환한 주황빛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베리아 얼음장을 품은 찬바람이 사방으로 몰아치며 따스한 기운을 금세 앗아가 버렸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꽃샘추위는 참 당혹스럽다. 어쩐 일인지 내게는 엄동설한의 겨울 추위보다 초봄의 꽃샘추위가 더 맵고 시리게 느껴져 어리둥절하다. 게다가 매년 이맘때면 며칠은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친다는 사실을 매번 싹 잊어버리고, 바삐 두꺼운 겨울 외투부터 정리해버리곤 한다. 그러다 꽃샘추위에 된통 혼이 난다. 봄꽃 만발한 봄맞이를 감기로 시작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혼이 나갈 만큼 너무나 추웠지만, 이왕 스케치북을 배낭에 짊어지고 나온 김에 간단하게라도 어반 스케치 한 장은 그리고 가자 싶어, 호숫가에 간이의자를 펼치고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방에서 거세게 불어닥치는 찬바람에 연필이나 튜브물감, 종이 팔레트 같은 가벼운 도구들이 날아가거나 넘어지기 일쑤였다. 추위도 문제였지만, 도구를 붙들어 가며 간단한 그림 한 장을 채우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부터 내 뒤편 벤치에서 요란한 박자와 리듬의 트로트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그림 그리기 힘든 상황인데, 갑자기 나타난 두 노인 덕분에 더 어수선해졌다. 노래 몇 곡 듣고 금방 떠날 줄 알았던 그들은 30분이 지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싶어 고개를 돌려 그들을 살펴보았다.


알고 보니, 남자 노인보다 여자 노인이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아마도 90세는 훌쩍 넘어 보였다. 남자 노인은 여자 노인의 손을 꼭 붙잡은 채 트로트 박자에 맞춰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들려온 대화에 나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났다.


“어머니, 그래도 바깥에서 햇볕 쬐니까 좋죠?”


그의 어머니는 머리가 첫눈처럼 하얗게 샜고, 얼굴 곳곳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아들에게 호수 위 햇빛처럼 반짝이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서서울호수공원 산책 2> 혼합재료, 16절, 2025년 3월


그들을 처음 봤을 땐, 잠시 가만히 앉아 있기도 힘들 만큼 추운 날씨에 호숫가에 오래 머무는 모습이 의아했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걱정도 됐다. 하지만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다소 이른 봄나들이를 나온 모자(母子)를 바라보며, 그동안 추위와 긴장으로 굳어 있던 내 마음도 봄볕에 말랑하게 풀려갔다.


어떤 이에게는 햇빛 찬란한 봄날의 소풍을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미리 봄맞이 소풍을 나와 꽃샘추위도 시샘할 만큼 최대한 오래, 다정한 시간을 보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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