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세이] 산책하는 마음(12)
일 년 중 산책하기 좋은 날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겨울 추위가 물러나고 날씨가 포근해지면 곧장 산책하기 좋은 날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봄의 불청객인 미세먼지와 황사를 깜빡 잊고 있었다. 지난주 초부터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며 마스크를 쓰고라도 나가볼까 고민하다가, 주말 즈음이 되어서야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난 걸 보고 한숨 돌렸다.
거의 일주일 만에 산책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말끔해진 공기 속을 걷는 기분은 뭐랄까, 마치 내가 깃털이 되어 공기 속을 가볍게 부유하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자연이 주는 선물 같은 날이므로, 해 질 때까지 오래 걷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산책로 입구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마주쳤다. 걷기 좋은 산책로를 조성한다며 공사를 한다고, 공원으로 들어가는 거의 모든 통로가 출입 통제 플래카드로 막혀 있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쉬운 대로 주택가 골목 산책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평소에 관심가지지 않았던 <유아숲체험원>이라는 푯말이 세워진 곳에만 통제 플래카드가 없다는 걸 발견했다. 늦은 오후라 아이들이 없을 것 같았고, 그곳 출입구로 들어가면 평소 다니던 산책로와 연결될 것 같아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내 예상과 달리, 그곳은 아이들을 위한 숲 체험 시설이라 놀이기구 위주로 구성된 한정된 공간이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산책하기 어려운 날인가, 아까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공원과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좁은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따라가면 분명 평소 다니던 구로올레길 코스와 연결될 것 같았다.
그곳으로 들어선 걸 곧 후회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느덧 날은 저물고, 공원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바닥은 메마른 낙엽으로 뒤덮여 있어 미끄러질 뻔한 적도 있었고, 공원 뒤편에 묘지가 곳곳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묘소를 세 번이나 지나쳐야 했다.
가볍고 산뜻한 마음으로 시작한 산책이 어느새 불안과 긴장이 출렁이는 모험이 되었다. 오늘 산책은 예상치 못한 난관의 연속이구나. 아니, 공기가 좋아졌을 뿐이지 나머지는 산책하기 힘든 조건뿐이고, 어쩌면 내 예상과 정반대로, 오늘은 산책하기 좋지 않은 날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급기야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내 귀에 처음 듣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새길래 저렇게 맑고 경쾌하게 노래하는지 궁금해져 하늘을 올려다보니, 높이 뻗은 나뭇가지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불안이 가라앉고 대신 고요함이 마음을 채웠다.
‘내가 이렇게 고요하고 한적한 세상에 혼자 있어본 적이 있었던가.'
신기하고 놀랍게도, 홀로 어두워지는 산길을 걷는 이 순간 내 가슴은 묘한 충만감으로 가득 찼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런 느낌을 두고 ‘고요의 희열’이라고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