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조 Jul 29. 2019

 나는 쪼잔하다.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 있어도 둘만큼은 속일 수 없다. 나 자신과 하늘이다. 내가 쪼잔한 인간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누군가 나를 쪼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쪼잔하지 않은 척하며 그들을 속였기 때문이다.


 평생을 아닌 척 혹은 그런 척하며 살았다. 어려서는 가난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고, 철이 들 무렵에는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라도 하는 척해서 쪽팔리지 않으려 했다. 없어도 있는 척하고, 있어도 없는 척했으며, 부끄러워도 숨기고, 겁나고 무서워도 용감한 척했다.


 사회에서는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했으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았고,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저항하지 못했다. 코드가 전혀 달라 대화가 꺼려져도 내색하지 않았고, 속으로는 경멸하면서도 존경하는 척했으며, 죽을 만큼 보기 싫은 사람 앞에서도 단지 그가 높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헤헤거렸다. 평생 그렇게 내가 아닌 나를 살았다.


 - 한국에 사는 게 어떠세요?

 - 다른 건 몰라도 마음 하나는 편합니다.

 - 마음이 편하다? 어떤 뜻이지요?


 일부러 여수를 찾은 분이 물었다. 마음이 편한 게 어떤 뜻이냐고? 갑작스러운 역공에 말문이 막힌다. 30년 동안 피우지 않은 담배가 갑자기 생각난다. 담배가 필요한 유일한 경우가 이럴 때다. 말문을 찾으려면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 그것도 어색하지 않게. 담배를 천천히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폼(?)나게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렇다고 담배를 다시 피울 생각은 전혀 없다. 대신 소주잔을 들어 천천히 들이키고 다시 채우며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 미국에서는 항상 불안했어요.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었지요. 어떤 일이 생겨 사람을 만나게 되면, 짧은 영어로 어떻게 의사를 잘 전달해서 소기의 목적을 이룰지 생각해야 했죠.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아무 생각 없이 가서 사람을 만나도 됩니다. 병원도 마찬가지고 관공서도 그래요.


 은퇴해서 경제생활을 하지 않으니까 정말 편해요. 우선 싫은 사람은 만날 필요가 없어요. 경제생활을 한다면 싫어도 억지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생기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스트레스는 사람 때문에 생기잖아요. 스트레스받을 이유가 없는 거죠. 바꿔 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만난다면 편하지 않겠어요?


 물론 은퇴하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미국 생활비는 너무 비싸다는 겁니다. 숨만 쉬고 살아도 3천 불은 드는데, 한국은 월 천 불이면 충분해요. 물론 혼자 살고, 돈 안 드는 취미를 가진 제 경우지만요. 원하신다면 제 생활비 내용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나이 들어 지향해야 할 삶이 소박하고 단순한 삶이라면 생활비가 많이 들 이유도 없습니다.


 이렇게 답하며 얼버무렸었다.


 작년의 무더웠던 여름은 어디로 갔는지, 금년은 계절을 잊을 만큼 너무 쾌적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이 순간도 멀리서 들이는 새 기저귀는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아이가 떠드는 소리, 강아지 짖는 소리만이 꿈속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마음이 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문득,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라며 자문자답을 해본다.


 바로 ‘척’하는 삶이었다. 아파도 안 아픈 척, 싫어도 부모님 뜻에 따르는 척, 사랑하면서도 안 그런 척, 힘들고 괴로워도 괜찮은 척하는 게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자 삶이었다. 왜 마음이 편할까? 방문객에게 한 대답은 틀렸다. 그것은 ‘척’하는 삶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그랬었다. 못 알아들었어도 알아듣는 척했고, 이해하지 못했어도 남들이 웃을 때는 억지웃음을 흘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애매한 상황을 숨겼고, 백인들 앞에서는 억울함이 있어도 드러내지 못하고 참았다. 지금은 달랐다. 억울하면 마음껏 따졌고, 이해하지 못하면 무슨 말을 했느냐고 당당하게 말하면 됐지, 알아듣는 척할 이유가 사라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직장 상사도 없으니 억지로 내게 무엇을 강요하는 사람도 없다. ‘척’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된다. 굳이 감정을 숨길 이유가 없다. 감정을 숨기고 ‘척’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이 너무 싫을 뿐이다. 이제라도 감정을 숨기지 않고 쪼잔하면 쪼잔한 그 모습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게 ‘나’를 찾는 방법이고, 마음이 편한 이유도 그것이다.


 누구는 나더러 감정적이라고 한다. 감정을 숨기지 않으니 맞는 말이라 부인할 의사가 없다. 혹자는 나더러 솔직하다고 한다. ‘척’하지 않으니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라 부정할 마음이 없다.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게 어떤 것이건,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모습을 감추기 위해 ‘척’하지는 않겠다는 삶의 자세다.


 방문객에게 했던 답변을 바꿔야겠다. 마음이 편한 이유는 ‘척’하지 않고 살기 때문이라고.


 <후기>

 5일째 새벽에 일어나 뛰었습니다. 아무리 여름 같지 않고 선선하다고 해도 뛰기에는 더워서 땀도 많이 흘리고 힘이 듭니다. 무슨 이유인지 정강이 통증이 사라져서 뛰기에는 수월해졌습니다. 오늘 걸을까 생각하고 나갔다가도 그 바람에 끝까지 뛰고 말았습니다. 하루 중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유일한 일이지만, 운동 후에 오는 성취감 때문에 거르지도 못합니다, 하하하.


 ▼ 딸이 보내준 손녀 사진. 아기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유전자의 힘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Not In My Back Yar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