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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Oct 12. 2019

우리는 어떻게 협소 주택을 짓게 되었나?

협소 주택을 지어 들어온 지 한 달이 됐다. 집을 짓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우리 부부는 싸움을 많이 했다. 나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집을 꿈꾸는 아내를 비난했다. 우리 신혼집은 길음 뉴타운에 있었다. 2년 만에 1억이 올랐다. 그 놀라운 자본 증식에 놀란 나는 푸르지오 아파트 아래쪽에 새로 지어지고 있던 래미안 아파트 8단지 분양권을 샀고 아파트가 지어지는 동안 어머니 집에 들어가 살았다. 돈에 눈이 멀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간 내내 아내는 고부 갈등에 힘들어했다. 나도 마찬가지. 내가 그렇게 크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내는 갓난쟁이 아이 앞에서 내가 큰 소리를 쳤다는 게 놀랍고도 분해 집을 나갔다.


그렇게 입주한 아파트는 2년 간 한 푼도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거기에 계속 살면 좋았을 것을. 이 아파트는 정이 안 간다는 아내 말에 우린 서촌으로 이사했고 한 푼도 오르지 않는 아파트값을 내내 원망했다. 고민 끝에 그 아파트를 처분했다. 아무래도 우리와 맞는 것 같지 않았다. 매입가가 3억 6000만 원이었는데 3억 5000만 원에 팔았다. 그 아파트를 팔고 우린 서촌의 오래된 빌라를 샀다.


그런데 웬걸. 아파트를 처분하자마자 아파트 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 25평 아파트는 지금 7억 5000만 원을 넘는다. 앉아서 4억을 손해 본 거다. 빌라는? 4년 동안 고작 4000만 원 올랐다. 몇 주 동안 힘들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잠이 안 왔다. 얼굴이 불콰하게 빨간 순간이 많았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아내 탓인 것만 같았다. 못난 놈. 내 깜냥, 내 그릇의 비좁음을 탓하며 어른스러운 인격을 갖추려 노력했으나 아까운 건 사실이었다. 4억이라니, 남은 평생 일을 해도 못 모을 돈 같았다.

행복했던 빌라 라이프. 인테리어까지 하고 들어 간 곳이라 오래 살 줄 알았다

4년 간 4000만 원 오른 빌라는 사실 남는 것이 없는 집이었다. 인테리어에 2000만 원을 넘게 썼기 때문이다. 취등록세며 매달 들어간 이자까지 생각하면 손해 보는 장사였다. 인테리어를 할 당시 그곳에 평생 살겠다던 아내는 빌라가 싫다며 한옥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가자고 했다. 동의했다. 나 역시 한옥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작은 마당에서 느끼는 자유와 망중한이 좋았다. 따사로이 내려쬐는 볕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내가 식물이 된 듯했다. 마음에 물이 올라오고 어느새 촉촉한 상태가 되었다. 아내는 그 빌라로는 다시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고 했고 나 역시 그러자고 했다. 내 집은 아니지만 한옥에서 그렇게, 소소하되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며 안온하게 살면 될 것 같았다.

이삿짐을 다 빼고 괜스레 센티한 기분이 돼서 찍은 한옥에서의 마지막 순간. 한옥에서 나는 많이 행복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내는 이번에는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한옥은? 좋다며? 하고 따지듯 물었을 때 자신은 작은 마당이라도 있는 단독주택이면 됐지 꼭 한옥을 고집한 건 아니란다. 돈이 어디 있어? 아파트 잘 못 팔고 4억을 손해 봤는데? 한옥 전세금 2억, 빌라 처분하면 생기는 돈 1억, 그간 모아놓은 돈 1억 5000, 나머지 돈은 이렇게 저렇게 대출을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아이고 이 사람아, 그 돈으로 지을 수 있는 집이 어디 있니... 꿈 깨라고 했다.

담장 너머 공간은? 아주 작은 욕조. 이 집에 있는 것은 다 작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오질 못 하니까.

아내는 꿈을 깨지 않았고 적당한 매물을 찾아왔다. 서촌 골목길에 있는 집인데 한 지붕 두 집 형태였다. 주인은 왼쪽 집에 살고 오른쪽 집은 세를 준 형태. 오른쪽 집만 내놨는데 새로 집을 지으려면 양쪽 집에 걸쳐 있는 지붕을 절단해야 했다. 지붕을 잘라보기 전까지는 왼쪽 주인집이 오른쪽 땅을 얼마나 물고 있을지 모르는 상태였고 지붕까지 잘라야 하는 난공사 때문에 오래전부터 매물로 내놨지만 거래로 이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가격은 점점 내려갔다. 땅 크기 18평. 땅값이 3억 2500이었으니까 평당 2000만 원이 조금 안 됐다. 지붕을 잘라봤더니 우리 땅을 많이 물고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아내는 그렇다고 4~5평을 물고 있을 것도 아니고 1~2평 물고 있을 텐데 그 정도는 상관없다고 했다. 서울에서 네모 반듯한 땅은 이미 없고, 있다고 해도 비쌀 것이며, 악조건을 이겨내지 않으면 결코 내 땅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1~2평 정도는 어떻게 인테리어를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했다. 난 이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아, 또 인테리어 비용 또 들겠구나...


결국 우리는 그 땅을 샀다. 난관은 많았다. 1200만 원을 들여 철거 공사를 하고 나니 실제 약 1.5평을 주인집이 물고 있었다. 그렇게 왼쪽 땅을 손해 봤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왼쪽부터 물리다 보니 우리가 산 땅은 또 오른쪽 집 땅을 물고 있었다. 그걸 직감했는지 옆집 남자는 철거를 할 때부터 정확히 하자며 현장을 지키고 서 있었다. 결국 오른쪽 집에도 물고 있는 땅을 고스란히 내줬다. 원래 계획했던 크기는 층당 크기가 8평 정도인 3층 집. 24평이면 비좁긴 해도 4 식구가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공사가 들어가고 나니 층당 크기가 6~7평으로 줄어들었다. 왼쪽 집과 지붕을 맞대고 있는 2층 집은 5평이 될까 말까였다. 애초에 2층에는 붙박이장을 길게 놓을 예정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막상 땅을 파보니 바닥이 온통 바위라 정화조를 앞쪽으로 빼야 하는 등 이런저런 난관이 많았다. 나는 애가 타 죽겠는데 보살 같은 아내는 이 정도는 각오했다며 태연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구나, 매사에 초조하고 걱정이 많은 나 같은 사람은 절대 못 짔겠구나 생각했다.


집을 지었다고 하면 지인들은 대단하다, 이제 건물주다 하며 놀란다. 엄청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큰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회사의 정 본부장은 툭하면 건물주님, 건물주님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 오면 토할지도 몰라. 하도 좁아서"하고 응수한다.

공사 중인 집.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들러 이곳저곳 둘러보고 어떨까, 좋을까, 여긴 잘못된 거 아닌가, 너무 좁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던 날들

나는 부자도 아니고, 이 집을 짓는데 들어간 돈은 6억이 안 된다. 물론 큰 금액이란 걸 안다. 하지만 따져보자면 서울 강북의 20평대 아파트값도 안 되는 돈이다. 저 멀리, 감히 시도도 하지 못할 큰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집이기도 하다. 돈이 없다기보다 편안하고 아늑한 아파트 생활을 포기하지 못해서 혹은 집을 지으면 3년은 늙는다던데... 그 복잡하고 힘겨운 일들을 굳이 치러야 하나 싶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나 역시 변화가 많은 걸 싫어하는 성격인데 한 가지 장점이라면 불편한 것을 잘 참고 주차 문제 같은 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집 역시 주차가 안 되지만 공용 주차장이 있고 거주자 우선 주차 신청을 하면 한 달에 약 6만 원만 내면 된다. 그마저도 잘 안 될 때가 많지만 그럴 때는 조금 걸어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대면된다. 그곳 주차비는 한 달에 13만 5000원. 아까운 돈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것저것 한치 두치 따지다 보면 내가 원하는 마당 있는 집에 살 수 없는 걸.


그렇게 집은 지어졌고 우린 이사를 했다. 딱 캠핑 의자 하나 놓을 만큼의 정원도 선물 받았다. 아이고 너무 작다 했던 크기인데 이 정도면 됐다. 캠핑 의자 등받이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안방도 애들 방도 너무 작아 인테리어 공사를 해야 하지만 아주 못 살 정도도 아니다. 창문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좋아 답답하지 않다. 르 코르뷔지에는 한 사람에게 필요한 거주 공간은 4평이면 족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더 크면 좋겠지만 너무 좁아, 답답해, 못 살겠어하지는 않는다.


본의 아니게, 아내 덕분에 집을 짓게 됐지만 집을 짓고 싶어 하면서도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공사 과정이 험난할 것 같아서, 지레 포기하는 분들에게 작은 용기라도 주고 싶었다. 사대문 안에도 분명 '골치 아픈' 땅이 남아 있을 것이다. 골치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는 땅은 없다. '집'에 중요한 가치를 둔다면서, 골치 아픔을 견디지 못하는 건 어딘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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