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um Nov 17. 2019

외국 이발기 01

나의 첫 외국 이발은 하와이에서였다. 한 달 이상 여행할 계획으로 출발했는데, 출발 직전 이발을 하지 않은 건 명백한 실수였다. 


내 머리는 곱슬머리다. 짧을 때는 티가 잘 나지 않지만, 조금만 머리가 길어도 제멋대로다. 난 성격이 까탈스러운 편이 아니지만, 내 머리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다. 나는 머리가 지저분한 것을 못 참는다. 긴 머리도 좋아하지 않는다. 덕분에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나만의 머리스타일이 있다. 짧고 단정한 머리다. 그거면 충분하다. 


우리가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하와이는 겨울이었다. 한국의 겨울을 뿌리치고 왔는데, 여름 같은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박한 기후변화에 몸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건조한 여름날이 계속되자, 머리카락도 평소보다 빨리 자라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제멋대로 엉켜버린 곱슬머리가 보면 볼수록 가관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반드시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 비용이 문제였다. 하와이의 물가가 비싸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비싼 미용비에는 쉽게 수긍되지 않았다. 인건비가 비싸서 그런 거라는 설명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머리 깎을 돈으로 차라리 밥을 먹고 말지!’ 그런 생각 때문에 번번이 머리 깎는 일은 뒷전이 돼버렸다.


돈보다 더 큰 문제는, 두려움이었다. 낯선 나라에 와서, 낯선 환경 속에서, 낯선 사람에게 내 머리를 맡기는 건 큰 모험이었다. 내가 어떤 헤어스타일을 원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말도 안 통하는데, 함부로 머리를 맡길 수는 없었다. 


머리 때문에 스트레스가 점점 쌓이는 건 나였는데, 아내가 먼저 머리를 깎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당신은 거울을 안 보면 그만이지만, 날마다 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기는 볼 때마다 답답하다고 했다. 싼 미용실도 이미 알아 두었단다. 그 말에 보기 좋게 설득이 됐다. 결국 아내 손에 이끌려, 반강제로, 처음 보는 미용실을 방문했다. 


미용실은 평소에 자주 가던 대형마트 안에 있었다. 아내 말처럼, 때마침 미용비도 할인행사 중이었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규모가 작지 않았다. 미용실 안에는 모두 4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이 한 명 있었다. 


미용사는 모두 2명이었다. 한 명은 머리를 자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맞이했던 미용사에게 내 머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나이가 지긋한 동양인 미용사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왠지 모를 신뢰가 생겼다. 


거울에는, 내 뒤에서 다른 손님의 머리를 자르고 있는 미용사가 보였다. 화려한 옷차림에 중년의 동양인 여성이었다. 강렬한 매니큐어 색이 눈길을 끌었다. 내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자마자, 그녀는 다시 손님의 머리를 깎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도, 어떤 스타일로 머리를 자를 건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미용사가 들고 온 사진첩에 내 미래의 모습이 있었다. 20명 정도 되는 남자의 헤어스타일 중에서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됐다. 나는 평소의 내 스타일과 가장 흡사한 4번 스타일을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나를 담당한 미용사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좋은 선택을 했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기한 볼거리가 등장했다. 한국의 미용실에서는 전혀 쓰지 않는 도구를 미용사가 내 머리에 씌우고 있었다. 고무 재질로 된 그 도구는 머리를 일정한 길이로 자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 도구가 자꾸 눈 앞을 가려서 내 머리가 어떻게 잘려 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지 못하는 사이, 머리카락은 점점 잘려 나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머리를 과하게 쳐내는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들기도 했다. 

한참 머리가 잘려 나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웃는 게 아니라, 웃음을 억지로 참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였는데, 차츰차츰 소리가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리도 즐겁게 웃을까? 빨리 머리를 자르고, 아내에게 이유를 듣고 싶었다. 


머리 위에 덮여있던 이상한 도구가 걷히는 순간, 아내는 나를 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뭐가 뭔지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보니, 마주 보는 거울 속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윗머리는 짧고, 옆머리는 길었다. 그나마 길이도 일정하지 않았다. 듬성듬성 쥐가 파먹은 듯한 머리였다. 바로 내 머리였다. 


뒤이어, 거울 속에서는 나이 든 미용사가 중년의 미용사에게 혼나고 있었다. 베트남어인지, 태국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연거푸 지껄이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난 듯했다. 나이 든 미용사의 이발기를 뺏어 들더니, 중년의 미용사가 갑자기 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노년의 미용사가 경이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설명하고, 자르고, 또 설명하고 자르기를 반복했다. 마치 실습용 마네킹을 앞에 둔 미용사들 같았다.


중년의 미용사가 최선을 다해 수습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번 잘려 나간 머리를 다시 붙일 수는 없었으니까. 거울 속의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전위적인 머리였다. 확실했던 건, 내가 처음에 사진첩에서 지목했던 4번 헤어스타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 내 머리를 보며 ‘중국 삼합회 하급 조직원’ 같다고 했다. 나름대로 개성이 있다고 위로한 뒤에, 혼자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내가 웃자, 나도 따라 웃었다. 나도 내가 웃겼다. 

이전 01화 여행지에서의 이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