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um Nov 17. 2019

아내는 전속 미용사


아내가 하와이에서 내 머리를 잘라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실 아내는 내 전속 미용사다.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는 아내가 깎기 시작했다. 동네 미용실에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내는 미용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내 머리만큼은 이제 그 누구보다 잘 깎는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시작했던 일이었다. 단순한 심심풀이였다. 아내가 한 번 깎아보겠다고 했다. 마땅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벌써 8년 전 이야기다.


물론 처음부터 아내가 내 머리를 잘 깎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처음 장만한 싸구려 전기이발기는 자꾸 머리를 집어삼켰다. 아내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내게 사과를 했다. 따끔거리는 아픔이 채 가시기 전에 또 사과했다. 머리를 깎는 건지, 사과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처음 깎은 머리는 좌우대칭이 아니었다. 좌우를 비슷하게 깎으려고 아내는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다. 사실, 아내보다 내가 먼저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죄 없는 머리카락은 점점 짧아졌다. 머리는 금세 또 자랄 거라고 아내는 나를 위로했다. 위로 뒤에 아내는 애꿎은 싸구려 이발기를 탓했다.


머리는 평소보다 더디게 자랐다. 아내는 어서 내 머리가 자라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성능 좋은 새 전기이발기도 장만했다. 날렵한 디자인의 일본산 제품이었다. 이전에 썼던 이발기는 애견용이었다는 뜻밖의 고백도 했다.


새 이발기는 머리를 더는 집어삼키지 않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아내는 성능 좋은 새 이발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오히려 너무 잘 잘려서 문제였다. 뒷머리를 자르던 아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땜빵 자국이 생겼다고 했다. 조금 뒤에는, 원래부터 있던 땜빵이었다고 우겼다. 이번에도 수습에 실패한 아내는 어차피 뒷머리는 보이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나를 위로했다. 나도 괜찮다고 했다. 누군가 내 뒷머리를 보면서, 웃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내 뒷머리를 보고 가장 많이 웃은 건 아내였다.


한동안 다니지 않던 남성 전용 헤어숍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머리를 자르는 내내, 아내는 말이 없었다. 머리를 다 자르고 나자, 아내가 내게 물었다. “맘에 들어?” 나는 최대한 우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자기가 자른 게 훨씬 나은 것 같아.” 아내가 해맑게 웃었다. 잃어버렸던 재미난 놀이기구를 다시 찾은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날 이후, 다시 아내가 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머리카락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아내는 새 이발기에 금세 적응했다. 유난히 눈썰미가 좋았던 아내는 내 마음에 드는 머리 스타일을 생각보다 빨리 찾아냈다. 이발 솜씨가 좋아지기 시작하자, 아내는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만족도가 올라갈수록 미용비도 같이 상승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아내는 내 머리를 보고 말한다. “자기 머리 깎을 때 됐네.” 그러면 나는 말없이 준비를 한다. 전기이발기를 꺼내 충전하고, 보자기를 몸에 두르고, 의자에 조신하게 앉는다. 거울 속의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이번에는 좀 색다른 스타일로 잘라볼까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하와이 숙소에서 머리 깎아 줄 때 기억나?” 머리를 깎다 말고 아내가 묻는다. 

“기억하지. 그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멋진 미용실에서 자기가 머리를 깎아주던 날인데. 머리 깎다가 이대로 죽어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까지 들었어.”

“정말? 그러면 자기 혹시 밴쿠버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 깎던 날도 기억나?”

“밴쿠버?”

이전 03화 외국 이발기 0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