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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Nov 17. 2019

외국 이발기 03

밴쿠버 여행 2일째 되는 날. 아내와 함께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동네 미용실을 지나갈 무렵. 갑자기 머리를 자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미용실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와이에서 아내가 머리를 잘라준 지 어느새 3주가 지났다. 슬슬 머리 때문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나를 잘 아는 아내는, 좀만 참았다가 한국에 가서 자르라는 말을 아예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는 하와이 미용실 사건처럼 재미난 일을 또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어수룩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미용실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세련된 남자 미용사가 손님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미용실로 곧장 들어섰다. 하와이에서 이미 최악의 미용 경험도 했겠다. 밴쿠버에서 또 당하라는 법은 없었다. 불행히도 그때는, 여행지에서 머리 깎지 말라는 김영하 씨의 충고를 듣기 전이었다. 


대기하는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덕분에 차분히 자리에 앉아서, 나보다 먼저 깎고 있는 남자의 머리가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미용사의 손은 빠르고, 숙련되어 보였다. 적어도 미용 실력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 정도 수준이면 내 머리를 믿고 맡겨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밴쿠버 미용실에는 하와이의 미용실처럼 20장의 머리 사진 같은 건 갖고 있지도 않았다. 미용실 그 어디에도 내가 참고할만한 헤어스타일 사진 같은 건 없었다. 더 믿음이 갔다. 의자에 앉자마자, 남자 미용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느냐고? 나는 짧고 명쾌한 영어로 답했다. 옆은 짧게.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내 말을 단박에 알아들은 건지, 미용사는 거침없이 이발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질문 같은 건 없었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궁금한 건 있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시원하게 잘려 나갔다. 미용사는 이발기를 자기 수족처럼 다뤘다. 거울 속의 변해가는 나는 익숙한 듯 낯설었다. 낯선 듯 익숙했다. 멋진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미묘한 이질감도 느껴졌다. 뭐 때문에 그런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거침없이 이발기를 다루던 미용사는 면도칼도 자유자재로 다뤘다. 한국의 오래된 이발소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면도칼이었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면도칼로 내 잔머리 털을 세심하게 다듬었다. 미용사는 이런 잔머리 털은 생전 처음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심혈을 기울여가면서 털을 깎았다. 어떻게 이런 솜털들을 몸에 계속 달고 다녔냐고 내게 묻는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숙련된 때밀이에게 몸을 다 맡긴듯한 기분이 들어서 몸이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오늘 피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머리를 다 깎고, 계산을 마치고, 팁까지 주고 나자, 미용사가 나를 보고 크게 웃었다. 해맑은 미소였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그에게 말했다. 모든 건 신의 뜻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제야 안경을 끼고, 제대로 아내를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아내는 살짝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아내가 내 머리를 보고 있어서, 머리 때문인 줄로 착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미용실을 나오자마자 아내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기가 머리를 막 깎기 시작했을 때, 남자 손님 3명이 들어왔어.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았지만, 남자들 모두 내 옆에 나란히 앉았어. 아마 자기는 머리 깎는 모습 보느라 잘 몰랐을 거야. 한동안 자기 머리 깎는 거 계속 보고 있었는데, 기분이 이상한 거야. 내 옆에 앉은 남자 3명 모두 나를 보고 있는 거 있지. 이 사람들이 왜 그러지? 왜 나를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거야? 곁눈으로 슬쩍슬쩍 봤는데, 자기 머리 다 깎을 때까지 계속 나를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잘못 본 걸 꺼야. 그런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번 옆을 살짝 훔쳐봤어. 그때 눈이 마주쳤는데,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거야. 한 명도 아니고, 셋 다 똑같은 표정으로 말이야. 그 모습이 뭐랄까? 나도 놀랐지만, 그들도 굉장히 놀란 것 같은 표정이었어. 마치 여자가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표정이랄까.”

“그런 일이 있었어?”

“더 웃긴 건 세 남자가 표정만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거야. 생긴 게 조금씩 다른데도, 옷 입은 것도 다른 데도 쌍둥이처럼 보이지 뭐야. 도대체 왜 그런 걸까? 한 편으로는 무서우면서도 궁금한 거 있지. 미용실 나오면서 다시 유심히 봤어. 그랬더니 말이야.” 

“응! 그랬더니?”

“세 남자 모두 머리가 다 똑같은 거야. 길이만 살짝 다르고. 스타일이 다 비슷해.”

“아! 그래서 닮아 보였던 거구나!”

“더 소름 끼쳤던 건.”

“?”

“자기 머리를 자르기 전에는 몰랐는데, 다 자르고 나니까 그 사람들 머리랑 똑같은 거 있지?”

“내 머리가? 그 사람들 머리랑 똑같다고?”


아내 말을 듣고 나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머리는 깔끔하고, 단정하게 잘 잘려 있다. 좌우 균형도 완벽하다. 솜털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딘가 살짝 어색하다. 내 머리 같지 않다. 가만히 오랫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니, 이 머리 어디선가 본 듯한 머리다. 머리 위에 모자를 하나 씌우고, 수염만 붙이면, 영락없이 똑같다. 이슬람교도들의 머리다. 이런! 당장이라도 엎드려서 절이라도 해야 할 듯싶다. 시간도 마침, 메카를 향해 절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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