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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um Nov 17. 2019

외국 이발기 02

한동안, 거울 속의 내가 낯설었다. 머리를 깎기 전보다 깎고 난 뒤에, 스트레스가 더 쌓이고 있었다. 중국 삼합회 조직원 같은 이따위 헤어스타일로 하와이를 마음껏 누비고 다닐 수는 없었다. 머리는 곧 자라고, 마음의 상처는 금방 아물겠지만, 하와이에서는 그 누구도 내 머리를 의식하지 않겠지만, 당장 눈앞의 내가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나처럼 선량하게 생긴 한국 남자가, 악독한 중국 삼합회 하급 조직원 머리를 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아내를 설득했다. “당신이 이끌고 간 미용실에서 머리가 이렇게 된 거니까 당신 책임도 있다”라고 협박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내는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내 말이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내 머리를 보고 웃는 거였다. 나를 볼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웃었다.


며칠 뒤, 웃음 그칠 날이 없던 아내가 웃지 않던 날. 나를 보고도 더 웃지 않기 시작한 첫날. 심각한 얼굴로, 아내가 내게 고백했다. 자신이 직접 내 머리를 AS 해주겠다고. 같이 방법을 한 번 찾아보자고 했다. 


나는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궁금해졌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냐고 물었다. 아내는 창피해서 당신이랑 더는 같이 못 다니겠다고 했다. 더는 자기가 힘들어서 안 되겠다고, 하루라도 빨리 사람을 만들어서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했다.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이 모든 일을 바로잡을 사람은 이제 아내밖에 없었으니까.


운 좋게도 때마침, 반값에 할인 중인 전기이발기를 살 수 있었다. 겉 포장 사진을 보니 애견용인듯싶었지만, 1만 원 조금 넘는 가격에 덥석 집어 들었다. 털에 귀천이 어디 있나 싶었다. 디자인이 너무 투박한 게 맘에 걸리긴 했지만, 미국 제품이라서 힘이 좋아 보였다.


지내던 숙소에 아무도 없던 날. 모두 외출하고 마침내 둘만 남기를 기다렸던 시간. 경건한 마음으로 거실 의자에 앉았다. 창문 너머로 다이아몬드 헤드의 능선이 보였다. 도시의 골목에는 겨울 햇빛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미용실 필수 품목인 거울이 없었지만, 창문만 있으면 된다고 아내가 말했다. 미용 가위도 없었지만, 아내가 주방 가위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가위도 필요 없다고 했다. 이발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했다.


아내의 심호흡과 함께 창문에 비친 남자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때로는 과감하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아내는 새 이발기가 잘 안 든다고 투정했다. 미국산 이발기가 힘이 없다고 불평했다. 나는 미국 전압이 110V라서 그런 거라고 아내를 안심시켰다. 아내 말마따나 머리카락이 잘리지 않고, 가끔 뜯기기도 했다. 머리가 따끔거렸다. 상관없었다. 나는 변신 중이었다. 이제 곧 중국 삼합회 하급 조직원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세상에서 가장 멋진 미용실에 앉아 있다는 거였다.


먼발치 다이아몬드 헤드 꼭대기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너무 멀어서 표정은 잘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웃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머리를 보고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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