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에는 우리가 찾는 것이 있었다
"여기도 차이나타운은 있지 않을까? 토론토 시내 어딘가에 차이나타운이 있다는 것을 본 적은 있는 것 같아. 우리 차이나타운에 가볼까?" "그럴까? 그래! 차이나타운에 가보자. 거기 가면 우리가 찾는 게 있을지도 몰라." "맞아! 거기에 가면 내복도 있고, 저렴한 신발도 있을 거야."
갑자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검색해 보니, 서쪽으로 2km만 가면 차이나타운이었다. 발은 아프지만, 기꺼이 걷기로 한다. 토론토의 추위도, 신발이 주는 고통도, 여행객의 순수한 호기심을 꺾을 수는 없었으니까. 거리를 무작정 걷는 것은, 우리 여행의 최고 덕목이었다.
지상에 오르자마자, 따뜻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두툼한 겨울 파커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목도리 하나만, 털모자 하나만, 장갑 하나만 있어도 살 것 같았다. 특히, 무릎까지 오는 털부츠를 신은 아가씨가 이 순간만큼은 가장 부러웠다.
토론토의 강추위를 잊게 만들어 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거리의 풍경이었다. 군밤장수가 있어서 신기했고, 거리에서 당당하게 자라는 화분 속의 식물을 보니 갑자기 기운이 났다. 멋진 외관의 스타벅스 앞에서는 커피 생각이 간절했고, 도로를 달리는 빨간 노면 전차는 마냥 생소하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거리의 제설차였다. 칼턴 스트리트를 지날 무렵이었다. 높은 빌딩들 사이로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거리 위에, 중장비 차량 한 대가 등장했다. 한국에서 보았던 중장비와 좀 다르게 생겼기에, 얼떨결에 사진을 찍었다. 제설 작업 중인 중장비였다. 운전하는 아저씨는 사진 찍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활짝 웃으면서, 엄지 손가락을 내민다. 아저씨는 틀림없이 오늘 있었던 무용담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것이다.
"내가 거리에서 눈을 막 치우고 있는대 말이야. 동양인 여행객 한쌍이 내 사진을 찍더군. 내가 눈 치우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나 봐. 한 장도 아니고 여러 장을 찍더라고. 내가 보기엔 그 사람들, 눈 안 내리는 나라에서 온 게 틀림없어. 눈 치우는 것을 엄청 신기하게 쳐다봤거든. 그래서 내가 엄지 손가락 들어서 마구 자랑했지. 너희는 이런 차 없지?"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다. 계속 서쪽으로 직진하다가, Spadina Ave에서 좌회전을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다.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지도도 없고, 스마트폰은 무용지물이라서 더욱 불안해진다. 신기하게도 거리에 실시간 지도가 있다. 당신 지금 여기 있어요 (You are here)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그림지도다.
"왜 우리가 퀸즈 파크까지 왔지?" "우리가 동쪽에서 걸어왔으니까." "아! 그렇구나. 그럼, 제대로 가고 있는 거네." 길을 잃는 건 여행자의 또 다른 덕목이다. 우리는 마땅히 길을 잃기를 바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둘 다 작은 신발 때문에 뒤굼치가 까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경로를 빠르게 재탐색한다.
차이나타운에 도착하기 전까지, 풍경은 쉴 틈 없이 재미를 주었다.
거리에서 캐나다 할머니가 유모차를 끄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한국의 할머니들이 유모차를 끄는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서도 유모차를 보행보조기로 쓰나 보네.' 섣부른 판단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유모차의 용도가 달랐다. 캐나다 할머니가 끄는 유모차 안에는 식료품이 가득 실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10kg은 넘어 보인다.
거리 곳곳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속도 보였다. 조형물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고, 기능도 모호해서 정체가 궁금했다. 몇 걸음을 더 걷고 나서야, 그 금속이 자전거 거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잠시 자전거 거치대로 쓰이고 있는 조형물이었다.
공공 자전거와 대여 시설도 인상적이었다. 자전거의 디자인과 거치대의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공자전거의 대여료는 24시간 기준으로 7달러였고, 3일 기준으로는 15달러였다.
한 번 타볼까 했는데, 보증금이 250달러를 된다는 걸 안 순간, 계속 걷기로 마음먹었다. 보증금은 언젠가 환불되겠지만, 아내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엄동설한에 아픈 발로 자전거를 타자고 하면, 내 인생은 지금 환불될지도 모른다.
차이나타운까지 이동하는 동안, 적지 않은 버튼도 눌러야 했다. 누르면 신호가 바뀌는 보행자 신호등 덕분이다. 우리 둘 다 보행자 신호등을 누르는 걸 즐거워했다. 보행자 신호등을 누르고 난 뒤, 숫자 세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신호등은 보행자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들지 않았다. 빨리 건너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도로에서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 있는 신호등에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극빈한 대접이었다.
차이나타운에는 예상대로 없는 게 없었다. 솜 장갑 두 켤레를 가장 먼저 마련했다. 털모자도 충동적으로 샀다. 목도리도 생겼다. 비록 아랫도리뿐이었지만 바지 안에 입을 내복도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발도 찾았다. 발이 아프지 않은 따뜻한 신발 두 켤레를 찾았다. 아내는 신데렐라라도 된 듯이 사뿐사뿐 걸었다.
10배 이상 가벼워진 발, 20배 이상 따뜻해진 몸, 100배 이상 좋아진 기분.
그 시간 이후의 차이나타운은 우리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터져 나왔고, 아무나 마주쳐도 즐거웠다.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고, 이대로 미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원>이라는 한글간판을 보고 반가워했고, 거대한 오리구이가 걸려 있는 식당이 마냥 신기하기도 했다. 거리의 허름한 건물도 모두 낭만적으로 보였다. 때맞춰 하늘에서 눈도 내렸다. 토론토 차이나타운에 눈이 내렸다. 오늘만큼은 밤새도록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