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턴센터에는 우리가 찾는 것이 없었다
"춥다." 둘째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어젯밤에는 방이 넓어서 좋았는데, 오늘 아침에는 너무 넓어서 춥다는 생각이 든다. 방안의 유일한 난방기구는 벽난로뿐이다. 장작을 피우는 벽난로가 아니라, 가스로 작동되는 벽난로다. 가스로 작동되는대도 불구하고, 꼭 장작을 때우는 것처럼 벌건 불빛이 오르락내리락거린다.
벽난로 성능은 바듯이 한기를 밀어내는 정도다. 온돌방의 따끈함이 유난히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샌들을 신고 토론토에 내릴 수는 없잖아. 한국에서 신고 온 여름 운동화도 추워서 안 된다고. 하와이에서 세일하는 신발을 사는 게 훨씬 이득이란 말이야. 토론토는 추우니까, 발목까지 오는 농구화가 나을 거야. 이 정도면 추위를 거뜬히 막아줄 거야. 이왕 사는 김에, 커플 운동화로 사자."
토론토에 오기 전, 온갖 감언이설로 마련한 커플 신발이 결국에는 말썽을 일으켰다. 두 켤레 모두 살 때부터 살짝 작은 느낌이 들었는데, 길들이면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발목까지 덮는 농구화라면, 토론토의 겨울을 버텨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섣부른 판단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신어 본 결과, 추위도 막지 못하고, 발까지 아팠다. 길 들지 않은 새 신발이 추위에 꽁꽁 얼면, 어떻게 발을 괴롭히는지 충분히 입증한 하루였다.
신발은,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걷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장 신고 나갈 신발이 없던 터라, 일단 신던 걸 신고 나가보기로 한다. 오늘은 좀 괜찮으려나? 눈길을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발이 시큰시큰 아려온다. 이 신발! 이 신발! 이 신발! 욕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계속 터져 나온다. "아무래도 안 되겠지?" "응, 발이 추운 건 둘째 치고, 아파서 못 걷겠어." "시내에 나가서 당장 신발부터 사야겠다." 만사를 제쳐 놓고, 신발부터 마련해야 남은 여행이 순조로울 것 같다.
신발 문제만 해결하면 될 것 같았는 데, 핀치 역까지 걷다 보니 고민이 또 하나 늘어났다. 있는 옷을 다 껴입고 나섰는데도, 토론토 추위에는 어림도 없었다. 추위에 나름 강하다고 자부한 내가 이럴 정도였으니, 유난히 추위를 잘 타는 아내는 아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춥지?" "너무 추워." "하루만 있을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복이라도 하나씩 사서 입어야겠다."
한국의 한 겨울 추위에도 입지 않던 내복을 토론토에 와서 찾게 되다니, 신고식 치고는 정말 혹독하다.
아침부터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가 두 가지나 생겼다. 첫 번째는 신발이었고, 두 번째는 내복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일단 이턴센터(Toronto Eaton Centre)로 가기로 했다. 돈도 찾고, 신발도 사고, 내복도 사고, 밥도 먹을 예정이었으니까.
이턴센터는 따뜻한 실내에 있는 대규모 복합 쇼핑몰이었다. 오늘같이 추운 날에 적격인 곳이다. 유독 겨울이 추운 캐나다에는, 이턴센터처럼 실내나 지하세계가 유독 잘 발달되어 있었다. 추위에 대비한, 캐나다 나름의 건축학적 대안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가 그 덕을 톡톡히 볼 듯하다. 주어진 모든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최적지는, 이턴센터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턴센터는 던다스 역(Dundas) 인근에 있었다. 핀치역에서 1라인을 타고, 13개 역을 이동하면 도착한다. 이동하는데, 정확히 31분이 걸렸다.
이턴센터에 내려서 한 일은,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걷는 거였다. 이천센터가 복합 쇼핑몰이라는 것만 알고 왔지, 그 밖에 아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기웃기웃 거리는 우리의 모습은, 도시에 처음 와 보는 촌사람 같았다.
평소에도 대형 쇼핑센터의 푸드코트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천센터 푸드코트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이미 호기심 가득한 아이로 변해 있었다. 딱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도, 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한 끼에 먹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오늘따라 안쓰럽게 느껴진다. 뭘 먹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으로 눈을 돌려본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대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이럴 때는 대중적인 기호에 한 번 맡겨보는 것도 괜찮지. 무작정 줄을 서 본다.
주문을 받는데, 종업원이 몇 가지 질문을 한다. 음식에 대한 기호를 묻는 것 같다. 잘 이해되지 않는 질문에는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받아 든 접시에는, 예상과 다른 결과물이 놓여 있었다. 아내의 접시에는 밥, 닭볶음, 브로콜리 볶음, 콜라가 나의 접시에는 밥, 생선 튀김, 쥬키니 호박볶음, 스프라이트가 놓여 있었다. 원했던 밥이 이게 아니었는데. 내가 말한 반찬이 이게 아니었는데. 바꿔달라고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캐나다 사람들은 내복도 안 입어?" "그런가 봐. 내복 같은 것을 아예 안 파는데?" 1시간이 넘게 이턴센터를 돌아다니고 나서, 둘이서 멋대로 내린 결론이다. 눈에 보이는 옷가게마다 다 들러서, 내복이 있는지 확인했다.
추위에 잘 적응돼서 내복이 필요 없다는 가설, 멋을 추구하려면 내복은 입지 않는 게 좋다는 패션론, 내복은 존재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노력 부족설, 캐나다 사람들이 내복 안 입으면 우리도 버틸 수 있다는 자린고비설까지 마침내 등장한다. 어쨌든, 저렴한 비용으로 방한을 해보겠다는 생각에는 차질이 생겼다.
내복보다 더 절실했던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세련되고 멋진 신발은 많았지만, 그건 댄디한 도시 멋쟁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찾는 신발은 투박해도, 튼튼하고 따뜻한 신발이었다. 결정적으로, 저렴해야 했다.
몇 시간 동안의 발품을 통해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턴센터에 우리가 찾는 것은 없다’
갑자기, 눈 앞이 깜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