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대한 아트센터에 들어는 순간 마법의 문이 열리고
퀸즈 파크 역에서 내렸다. 퀸즈 파크 역에서 내린 이유는 그곳에 퀸즈 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내려서 걷다 보니, 이렇게 추운 날 공원을 걷는 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론토에 머무는 동안 하필 제일 추운 날이었다.
열 번 정도 후회를 반복할 즈음, 누군가 곁을 황급히 앞질러 갔다. 곁눈질로 보니, 양복을 입은 백인 아저씨였다. 자세히 보니, 양복만 입은 아저씨였다. 멋을 내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애처로웠다. 겨울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며 걸어가는 모양새가 안쓰러웠다. 양복 옷깃만으로,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는 내가 더 추울 정도였다. 이유가 있었다. 걸을 때마다 양복바지와 까만 양말 사이로 맨살이 훤히 드러났다. 하얗게 드러난 맨살을 보는 순간, 갑자기 이가 덜덜 떨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떨렸다.
아저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거짓말처럼 추위가 가시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간사하게도, 겨울은 역시 추워야 제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풍스러운 건물 하나가 길을 가로막았다. 건물 입구에 캐나다 국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국기가 펄럭거렸다.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무슨 건물인지 궁금해져서, 무작정 건물 정면을 향해 걸었다.
제복을 입은 사람이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 저렇게 밖에 서 있으려면 정말 힘들겠다."
아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멋진 교대식 같은 건 없었다. 가벼운 터치로 임무교대 완료. 한참 후에, 그 건물이 바로 온타리오 의회 의사당(Legislative Assembly of Ontario)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좌측 길로 샜다. 계속 직진하면, 곧 퀸즈 파크가 나올 것이다. 앞만 보고 걷고 있는데, 멀리서부터 유독 시선을 끄는 게 있었다. 한겨울인데 무지개가 피었다. 무작정 방향을 틀었다. 가까이 가보니 무지개 색 지붕을 지닌 건물이었다. 새로운 이정표가 등장했다. 퀸즈 파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건물 앞에는 HartHouse라고 적혀 있었다. 옆에 적혀 있는 설명을 본 순간, 우리가 지금 대학 건물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가 토론토대학이구나. 퀸즈 파크에 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대학 안으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갔다. 나아갈 때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문양들을 다 모아 놓은 듯한 건물도 있었다. 편집광적인 문양 앞에 서니,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현기증이 났다. 아내가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의 문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뒤를 따랐다.
들어선 곳은 토론토 대학 아트센터 (University of Toronto Art Centre)였다. 마법의 문을 통과한듯한 기분 탓이었을까? 아내도, 나도, 갑자기 젊어진 것 같았다.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듯한 착각이 들었다.
갓 입학한 신입생의 마음으로 건물 안 곳곳을 걸었다. 예쁘다고 아내가 감탄했다. 젊어진 우리의 모습이 예쁘다는 것인지, 건물이 예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공간이었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 충분했고, 아름답다는 단어만으로 부족한 순간이었다.
건물 안은 잘 다듬어지고 조각된 나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복도를 사뿐사뿐 걸었다. 낯선 여행자의 호기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걸었다. 그래도 발자국 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의 동선, 계단의 곡선, 계단의 난간, 계단에 있는 창문까지 잘 설계되어 있었다. 각 방의 문, 강의실의 문, 심지어 화장실의 문조차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예뻐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모두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다듬으며 전해진 것이었다.
방학이라 사람이 없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둘만 남겨 놓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듯하다. 사방이 고요하다. 덕분에 우리는 더욱 대담해졌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상황극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앉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나요?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러면 영어가 늘어요." "그래서 제 영어가 안 느는 것이었군요." 한바탕 신나게 웃는다.
다시 복도를 걷는다. 벽에 붙어 있는 전단지가 눈에 띄었다. 내용을 짐작해 본다. 163 클래스룸에서는 파업에 대한 논쟁을 할 예정이고, 머핀과 핫초코 모임이 오후 4시에 있네. 당연히 머핀과 핫초코 모임에 가야지. 전단지를 따라서 걷다 보니, 복도 끝에 있는 뜻밖의 공간에 도착했다.
국기가 걸려 있는 방이 나타났다. 이 방은 뭐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성큼 들어섰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학생 한 명이 눈앞에 등장했다. 우리만 놀란 게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다. 어색함을 깨는 인사가 오가자마자, 초스피드 속사포 영어가 여학생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열정 가득한 수다쟁이였다. 문제는 우리였다. 열과 성의를 다한 그녀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녀는 설명을 멈추더니, 친절하게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느리게.
국기가 걸려 있는 그 방 뒤에는 전시장이 있었다. 토론토 미대생들의 작품과 캐나다 화가들의 작품, 그리고 미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도 있었다. 토론토 미대생들의 작품을 보는 기회가 생기다니, 뜻밖의 횡재였다.
유난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인상적인 비디오 아트였다. 작품 내용은 이렇다. 피켓을 든 사람들이 갑자기 거리에 등장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켓을 들고 열심히 시위를 한다. 동조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생겨난다. 그런데, 시위하는 사람들의 피켓 안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한다. 시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의문에 가득 차 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시위를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시위하게 된 거지? 비어있는 피켓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묻어 난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공허한 시위가, 역설적으로 시위의 당위성을 묻고 있었다.
문을 나서는 순간, 아쉽게도 마법도 같이 멈춰 버렸다. 아내도, 나도, 더 이상 젊은 시절의 미대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새 현실 속의 부부로 성큼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건물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그곳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