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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17. 2020

시어머님 '첫' 생신

결혼 이야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2)


결혼식 후 행사로 꼽는 것들이 있다. 양가 집들이, 양가 부모님의 결혼 후 첫 생신 등. 시댁과 워낙 가까이 살았기에 시댁 집들이는 단출하게 진행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숙모님이 보내준 반찬들을 얹고 국만 끓여 시부모님을 모시고 식사를 했었다. 친정 집들이는 하지 않았다. 집이 좁아 삼촌들까지 모실 수는 없었고 아버지만 모시기엔 술주정이 걱정됐고 조금 더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모두 모시고 싶다는 욕심에 미루다 그냥 넘어가버렸다.


결혼식 후 2개월 여 만에 시어머니의 생신이 다가왔다. 아무도 그러라고 시키지 않았음에도 나는 자발적으로 연차를 냈다. 생신 한참 전부터 인터넷의 세계에 빠져 신중하게 메뉴를 골랐다. 찰밥과 잡채와 생선과 미역국과 불고기....(였던가?)는 꼭 있어야 한다는 어느 글을 보고 그 메뉴들의 레시피를 찾아서 정리했다. 필요한 재료들의 목록을 정리하고 생신 전날 퇴근하며 장을 봐서 정말 1의 거짓도 없이 '밤을 새서' 요리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스로에게 요리능력이 없음을 잘 인지하고 있었지만, 인터넷을 통해 글로 배운 요리는 나에게 과한 자신감을 안겨줬다. 모두가 '너무 쉬운 요리'라고 말을 했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남편과의 대화가 꾸준히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아 어른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고, 깎듯하게 예의를 지키는 것과 선을 넘지 않으며 친밀도를 높이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어른 대하기가 어려운 '어른포비아'인 것 같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남편은 어머님과 나의 의견이 다를 때마다 '어른포비아'인 니가 이상한 거라고, 어느 집이나 다 이렇게 하는데 니가 부모님과 교류가 없어 모르는 거라고 말을 하곤 했다. 그 말이 몹시도 듣기에 거북했다. 내게는 상처인 이야기를 진심을 담아 꺼냈을 뿐인데 그는 내 상처를 자신의 무기 삼아 나를 공격하는 도구로 썼다. 어쨌든, 나는, 결손가정에서 자라 어른 모실 줄 모른다는 그 말을 듣기가 싫었고 오히려 과하게 해버려 다시는 그런말을 듣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 밤을 지샜던 것 같다.




불고기를 재워놓고

(그 많은 시판용 불고기를 외면하고 배를 갈고 간장을 넣어 직접 양념을 만들었다)

잡채에 들어가는 그 모든 재료를 볶고

(이 날 이후 다시는 잡채를 만들지 않는다. 난이도 최상)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안치고

생선을 굽고.....

마지막으로 월남쌈 재료들을 자르고 그것들을 한입에 먹을 수 있게 돌돌 말고 있을 때 동이 텄다. 돌돌돌. 눈앞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아침 9시에 나는 그 모든 음식들을 시댁으로 날랐다. 그리고 모두를 밥상으로 모았다.


............... 안타깝게도 가족들은 밥을 먹으며 점점 말을 잃어갔다. 나 역시, 그 졸린 와중에도, 이 음식들이 거대한 소금산으로 나를 이끌고 가는 느낌에 압도돼 월남쌈을 집어 먹으며 마구 물을 들이켰다.


마트에서 잡곡을 팔던 아주머니는 찰밥 재료를 사는 내게 찰밥에는 소금을 조금 넣으면 맛있다는 꿀팁을 주셨지만 나는 '조금'의 양을 알지 못했다. 인터넷 불고기 양념 레시피에는 어른들이 드실 거면 간장을 조금 더 넣으라는 꿀팁이 있었다. '조금 더' 라는 간장의 양 역시 나는 알 수 없었고 익혔을 때 조금 짠 듯 했으나 밥이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완성된 잡채가 왠지 민둥민둥 하얀 듯해 간장을 '조금 더' 부었다. 그리고 집들이 때 시도한 적이 있었기에 가장 만만했던 미역국은 오래 끓이면 깊은 맛이 날 것이라는 내 기대와는 다르게 바다를 품은 맛이 났다. 사람의 손으로 바다를 만들어내다니. 대단했다.

 

짠 맛과 짠 맛과 짠 맛이 만나 도무지 젓가락을 쉽사리 뻗기 힘든 그런 조식이었다. 짠 맛을 피하려 밥을 먹어도 밥 역시 짰다. 도무지 도망갈 곳이 없는 전쟁터 같은 밥상이었다. 모든 음식이 혀를 공격했다. 예쁘라고 만들어둔 월남쌈은 금세 동이 났고 그 누구의 밥그릇도 쉽사리 비워지지 않았기에 식사 자리 역시 쉽게 끝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엄청난 아침 식사였다.

'나도 어른 모실 줄 알아'를 보이려는, 스스로의 강박이 만들어낸 대참사였다.






고난의 행군 같았던 식사를 '무사히' 마치신 어머님을 모시고 미리 예약해둔 네일샵에 갔다. 네일아트를 한 번도 받아보신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름은 고심 끝에 준비한 서프라이즈(?)였다. 이곳에서 조식 대참사를 만회해야 했다. 하지만 밤을 샜고, 어쨌거나 배가 불렀던 나는 조용한 네일샵을 버텨내지 못했다. 손을 만져주시는 분들이 조근조근 말을 걸어주셨지만 나는 그분들께 손을 맡겨놓고 미친 듯 헤드뱅잉을 하며 꿈나라로 떠났다. 손이 자유로웠다면 뺨이라도 쳤을 텐데. 고개가 뒤로 꺾여 눈을 뜨고는 '미쳤나봐. 정신차려' 생각을 하면서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졸아댔다. 정신을 차리니 손톱에 예쁜 색깔 매니큐어가 발려져 있었다.


이대로 끝낼 순 없었다. 다음으로 준비한 코스는 중국식 마사지. 예약을 하면서 갓 결혼한 며느리인데 어머님 생신이라 함께 가려 한다며 잘 좀 부탁드린다고 거듭거듭 말을 했던 곳. 그곳에서는 아주 대놓고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엎드려 코를 고니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몇 번이나 스스로 놀라 자다가 깼고, 그럴 때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를 되뇌었지만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한참을 자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그토록 열심히, 그토록 과하게 이런 하루를 준비했을까.(어머님을 괴롭히고 싶었던 것은 진심으로 아니었다.) 대체 얼마나 잘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나도 어른 모실 줄 알아"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뿐인데, 결과는 참담했다. 어머님은 '좋은 하루'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아마도 '완벽한 하루'를 드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저 삐딱한 애 아니예요', '저 어둡게 자라지 않았어요', '저 부족한 애 아니예요' 등등을 인정받고 싶었던 그런 마음.  


자연스럽지도 결과가 훌륭하지도 못한 이런 과한 대응이 오히려 결핍을 마구마구 드러내는 것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지만, 그때는 그 정도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엄마없이 자란 티'를 내고 싶지 않다는 그 열망에 사로 잡혀 모두를 불편하게 한 것이다.

한없이 낮은 자세로, 결핍을 마구 뿜어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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