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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Nov 16. 2020

진짜진짜 시작

결혼 이야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1)


신혼여행에서의 첫날밤은 '연애 외전'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결혼한 부부의 진정한 첫날밤은 결혼식 관련 행사들이 모두 마무리되고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맞이하는 첫 밤이지 않을까.


워낙 일정이 빠듯했던 탓에 결혼식을 치르고 1~2주쯤 지나서야 짐을 옮겼던 것 같다.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이사업체를 부를 만큼 짐이 많지도 않았다. 남편의 지인들이 모여 내 이사를 도왔다. 좁은 집에서 좁은 집으로의 이사였기에 여기저기 테트리스하듯 짐정리를 끝냈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새 tv와 새 냉장고와 새 침대와 새 화장대를 마련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신혼 기분은 차올랐다. 싱크대엔 새 그릇과 새 냄비와 새 수저가 자리잡았고 화장실엔 새 수건과 새 칫솔과 새 치약이 마련됐다.

대략적인 정리를 마치고 이사를 도와준 이들과 함께 집에서 술을 마셨다. 상도 없이 빈 박스같은 것을 엎어놓은 채 그 위에 배달음식을 차려놓고 술잔을 주고 받았다. 주변엔 정리되지 못한 짐들이 마구잡이로 쌓여있었지만 깔깔 웃으며 즐겁게 술을 마셨다. 한치 앞도 모를 미래, 미리 걱정해서 무엇하리. 둘이 함께 있고,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그렇게 신혼집에서의 첫날밤이 깊어갔다.





초반엔 그저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온 기분이었다. 내일이면 혹은 며칠 후면 보금자리로 돌아갈 여행. 며칠이 흘러도 이 기분은 그대로였다. 출근 할 때는 갑자기 일상으로 돌아갔다가 퇴근 후 장을 보면서는 다시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 하루 종일 오늘의 메뉴를 고심하고 인터넷 레시피를 찾아보고 필요한 재료들을 모조리 사서 집으로 와 요리를 했다. 한약맛 찜닭, 오줌 냄새가 나는 샐러드 등 신박한 결과물을 탄생시키는 내 손에 감탄하며 어떻게든 밥을 해결하고 나면 8~9시쯤이 되었다. 영화를 한 편 보거나 술을 한잔 하거나, 혹은 둘 다를 한 번에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면 일상으로 복귀.

여행같은 나날들이었다.

하지만......안타깝게도 이 여행은.... 아무리 기다려도 끝이 나지 않았다.


여행을 끝내고 혼자 편안히 쉴 수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여행이 끝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계속 되는 여행이라니! 심지어, 돌아갈 집도 없었다. 맙소사. 그렇게 한 달,두 달이 지나고.. 세 달쯤 되자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1박 2일 여행만 다녀와도 피곤한데 끝나지 않는 여행지옥에 빠진 것 같은 삶은 당연히 피곤했다.


진짜 여행지에서 머무는 집은 구석구석 청소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 이틀 사용한 식기들도 씻어두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릇에 기름기가 남았는지 안 남았는지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행 중이 아니었다. 이곳이 여행지가 아니라 일상이라는 자각은 극도의 피곤함과 함께 시작되었다. 퇴근 후 자취방을 뒹굴거리며 심심해 하던 일상은 옛일이 됐다.


사용한 식기들을 치우고 정리하고 집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그렇게 주말을 다 보내도 이틀 정도가 지나면 제자리가 됐다. 여행지에서 하듯 별 생각없이 써댔던 지출은 차곡차곡 쌓여 카드값으로 돌아왔다.

갓 제대한 그를 두고 직장으로 가 일을 하고 돌아오면 여전히 갓 제대미를 뽐내는 그가 있었다.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의 기준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라는 사실도 이 무렵 알게 됐다. 여행의 기분이 사라질 때쯤 나는 그 구역 환경지킴이가 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서식할 만한 환경을 지켜내기 위해 퇴근 후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쓸고 닦고 치우고 정리하고.

 

환경파괴자는 환경지킴이의 '과한 정리벽'을 못마땅해 했고

환경지킴이는 환경파괴자의 끝없는 파괴행위에 기막혀 했다.


그렇게 또, 새로운 싸움들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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