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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날엔 Oct 15. 2023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자유

타 지역에 사는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온다고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먹는 즐거움을 크나큰 낙으로 여기며 사는 나는, 일단 "뭘 먹지?"부터 생각한다. 맛집을 선택할 것인지 혹은 동선을 중심으로 결정할 것인지를 고려하고,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식당을 고른다.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 종류, 식당 분위기 등을 알아보고 예약까지 해버리는 게 마음이 편했다. 심지어 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외국에서 온다면, 그리고 상대의 마음이 요즘 조금 힘들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뭘 먹으면 좋을까, 뭘 하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까, 짧다면 짧은 1박 2일을 어떻게 채울까. 






일본에 사는 사촌언니가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을 때도 나는 '뭘 먹지'부터 생각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메뉴는 막창이었다. 지역 대표 음식이니까. 하지만 언니가 대구에 올 때마다 매번 늘 똑같이 막창집에 갔던 기억이 났다. 한 번은 소막창, 한 번은 돼지막창, 자, 이번에는 다시 소막창 하려니 뭔가 마음에 걸렸다. 심지어 언니는 요즘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복잡한 상태. 시끌벅적한 막창집에서 왁자하게 술을 마실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집에서 배달해 먹을까, 막창 말고 다른 걸 먹어볼까, 주말 저녁이라 사람 많을 텐데 어딜 가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여행'이었다. 1박 2일의 바닷가 여행. 조용한 바다를 걷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는 일정으로 다녀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일본에서 온 사람과 바다에 가는 건 이상한가 싶어 언니의 의견을 물었지만, 언니 역시 대 찬성. 조용한 곳에서 하루를 보내며 힐링하고 싶다는 언니의 밝은 목소리에 "그럼 가자" 외쳐버렸다. 나에겐, 차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목적지로 삼은 펜션은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어 익숙한 장소였다. 주차장도 넓었다. 언니에게 설명도 덧붙였다. 아직은 매우 미숙한 실력이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살아 돌아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괜찮겠지.." 

나는 활기찬 목소리로 "당연하지!" 외쳤다. 어차피 가기로 결정한 이상, 미리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숙소 예약을 하고, 그곳까지 가는 길도 지도앱으로 여러 번 확인했다. 나만 잘하면, 내가 사고만 안치면, 분명 아름답게 마무리될 여행이었다. 면허조차 없는 언니의 상황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언니가 운전을 잘했다면, 휘청휘청 대는 초보의 차에 타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울 테니까. 


토요일 해질녘 대구에 도착한 언니와 함께 바다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자동차 안에서 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집중력이라니. 이곳이 카페라면 창밖 풍경이나 다른 사람 구경이라도 할 텐데, 캄캄한 고속도로 위에선 시선을 빼앗길 거리가 없었다. 목적지까지 꼼짝없이 나란히 앉아 있어야 하니, 절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길 위에 다른 차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세상에 우리 둘만 남아, 지나온 생을 털어놓는 듯한 묘한 분위기. 단 둘만 있는 밀폐된 공간에 적당한 어둠이 가득하니, 그 어렵다는 공감과 소통이 절로 이뤄졌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여, 캄캄한 밤에 고속도로를 타세요!' 외치고 싶어질 정도였다. 내 세상에 연인 같은 건 없으니, 남에게라도 추천해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오랜만에 만났다기엔 신기할 만큼 쫑알쫑알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 화제로 나온 게 저녁 메뉴였다. 도착 예정은 8시쯤. 나는 숙소로 가는 길에 있는 큰 마트에 들러 고기 등을 사서 바비큐를 할 계획을 품고 있었다. 조금 귀찮다 해도 펜션의 꽃은 역시 바비큐니까. 하지만 언니가 난색을 표했다. 한국에 왔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일본에선 생선 자주 먹지?" 하며 고기를 메뉴로 택했고, 며칠째 고기고기고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계획주의자인 나에게 이런 상황은 매우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이럴 땐 손님의 의견을 듣는 게 옳았다.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뭐 먹고 싶어? 그쪽으로 가자."

"그 동네에 수산시장 있던데 거긴 어때?"

"................."


수산시장. 그래, 해산물에 환장하는 나도 참 좋아하는 곳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 온갖 메뉴가 그득하니까. 하지만... 나에겐 차가 있었다. 평일 대낮에도 초보운전자에게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이 시장이었고, 하필 가장 붐빌 것 같은 토요일 저녁에 오래된 수산시장에 가서 운전을 할 자신이 정말 없었다. 들어갈 순 있을까? 주차는 할 수 있을까? 자동차와 사람이 혼재한 그곳으로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있을까? 

"언니, 수산시장은 못 갈 것 같아. 미안."

이런저런 설명을 들은 언니는 깔깔 웃었다. 운전을 할 수 있고 차도 있는데,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극명히 나뉘어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웃긴 듯했다. 어디든 가자며 큰소리쳤던 나도 함께 웃었다. 이건 모두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결정이니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결국 검색 끝에 숙소 근처에 있는 작은 횟집을 찾아 들어갔다. 주차장엔 빈자리가 가득했고, 핸들을 사락사락 감아대며 부드럽게 주차 성공. 삑- 하며 차문을 잠글 땐 정말이지 베스트 드라이버로 인정받은 느낌마저 들었다. 누구한테 인정을 받은 거냐 따져 묻는다면, 그건 바로 나야 나. 이 먼 곳까지 무탈히 와서 주차까지 마무리 한 내가 엄청나게 자랑스러웠다. 그까짓 수산시장이야, 좀 더 익숙해진 후 가면 되니까. 


다음날도 맛집을 검색하며 돌아다녔다. 점심은 인근에서 유명하다는 짬뽕집에서 먹었고, 커피는 바다뷰가 끝내준다는 카페를 찾아가서 마셨다. 이런 여행, 차가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 익숙하리라. 하지만 남이 운전하는 차만 얻어 타던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매번 찐으로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와, 언니, 별일 없이 여기까지 왔어!"

40여 년 나를 본 언니는, 나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혼자 신이 났을 때는 우쭈쭈 해주는 게 최선임을 이미 파악한 그녀는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운전 잘하네"하며 칭찬을 쏟아냈다. 그런 기분으로 식당에 들어섰으니 그게 뭐든 맛없을 리가 없었다. 지나치게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서 운전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다. 


차가 없었다면? 우리는 집 근처 어디에선가 저녁을 먹고 평범한 하루를 보냈으리라. 여행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대중교통으로 이곳에 왔다 한들, 맛집까지의 차편을 알아봐야 했겠지? 버스를 기다리고 택시를 부르고 하다 보면 시간도 에너지도 훨씬 더 많이 들었을 게 뻔했다. 타지 생활에 잔뜩 지쳐있는 언니를 태우고 여기저기를 다닐 수 있는 이 상황을, 내가 이끌 수 있다는 게 뿌듯하기도 했다. 이번엔 1박 2일이지만 다음엔 더 멀리 더 오래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와 함께든. 혹은 혼자서든. '여기 가보고 싶어'하는 불확실한 상상을, '일단 한 번 가볼까'하는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 그게 바로 자동차의 매력이자 필요였다. 




성공은,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렇게나 대화를 하면서도 여행에 성공했으니, 혼자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쑥쑥 자라났다. 아이를 남편집에 보내는 주말, 별 일정이 없을 때면 '어디를 한 번 가볼까?' 찾아볼 만큼 자신감은 기세등등 자라나고 있다. 그래서 혼자 자주 여행을 떠난다는 결론...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면 좋으련만. 나는 집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긴 했다. '드라이브하기 좋은 곳'을 검색해 몇 차례 다녀오긴 했지만, 자꾸자꾸 나가는 게 쉽지는 않았다. 자신감보다 훨씬 더 익숙하고 무거운 것이 게으름과 귀찮음이니까. 


그럼에도, 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올 가을 목표는 두 군데. 첫 타깃은 자동차극장이다. 여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한밤중에 산에서 내려오는 게 두려워서 미루기만 했던 곳. 하지만 지금은 10월. '맛있는' 바람이 솔솔 불고 있으니, 용기 또한 폴폴 솟아오른다. 괜찮은 영화가 걸릴 때를 기다렸다가 꼭 달성하고 말리라. 해지기 직전 도착해 단풍 구경을 하며 커피 한잔을 마시고 영화를 본 후 천천히 내려오고 싶다. 

두 번째 타깃은 군위 사유원. 넓은 정원과 건축물이 어우러져 하루 코스로 제 격이라는 곳. 이곳 역시 작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막상 '출발!'을 못했다. 미루고 미루는 게으름뱅이지만, 계획을 세우면서는 이렇게나 설렌다. 이 나이에 두근거릴 일이 뭐가 있으랴. 그래, 드라이브 계획을 세우며 설렐 수 있는 건 진짜 자동차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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