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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Nov 17. 2024

햇볕은 쨍쨍 낮술은 반짝

'식구'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하여

먹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식구(食口).'

'밥을 같이 먹는 사람?' 정도로 유추되는 단어였다. 사전은 두 가지 의미로 식구를 정의했다.

1.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2. 한 조직에 속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단어의 정의를 보며 시대 변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농경사회에선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과 한 집에 함께 사는 사람이 거의 비슷하지 않았을까. 식당도 몇 없던 시대에 밥을 먹는다는 건 집에서나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을 테고, 그러다 보니 식구와 가족이 동의어처럼 쓰였을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그 뜻은 확대되어 갔으리라. 출근을 해서 점심쯤은 밖에서 먹는 경우가 늘어났을 테고, 어마무시한 근무시간을 자랑하던 과거에는 식사 자체를 밖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식구라는 단어의 정의가 '한 조직에 속한' 사람으로 확대된 게 아닐까. 한 집에 살지 않아도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 생긴 거니까.


내 경우엔 '식구'라는 단어에 개인적 감정을 넣어 사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극히 좁은 내 세계에서 '식구'라는 단어에는 좀 더 정서적인 의미가 포함된다. 한 조직에 속해있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를 식구라고 부르기는 싫으니까. 감정이 들어가는 친밀한 상대에게만 식구라는 친밀한 단어를 쓴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 마음 편히 밥을 먹으며 낄낄댈 수 있을 만큼 정서적 친밀감을 느끼는 대상만 식구라 칭하고 싶은 거다.

대표적 인사말 중 하나인 "언제 밥 한 끼 하자"라는 말도 내게는 그런 의미 같다. 이런 인사를 나눈 후 진짜 밥을 먹을 이들과는 바로 달력을 꺼내 서로의 일정을 보며 날을 잡는다.

"이번 주 수요일 어때요, 다음 주는요?"

반면, 애매한 사이일 경우에는 그 상태로 돌아선다. 다시 연락드릴게요, 등의 애매모호한 문장을 던지면서. 결국 입(口)으로만 떠드는 약속을 하는 사이란 그런 것이다. 거리감은 여전하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기엔 조금은 불편한 사이. 이쯤 되니 식구(食口)라는 단어의 입 구(口)라는 글자가 새삼스레 눈에 들어온다. 입이란 얼마나 특별한 신체 부위인가. 먹고 마시는 행위의 주체로 생명 연장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대화라는 행위를 통해 정서적 충족감까지 이끌어가는 입. 그런 입이 포함된 식구(食口)라는 단어도 다시 보게 된다.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의지하는 식구라는 관계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쩌면 필수적인 존재 전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식구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오랜 회사 동료들.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런저런 즐거움을 찾고 있다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가장 고전적인 점심시간 루틴은 역시나 회사 동료들과 함께 먹는 점심이다. '무조건 함께'라는 의무에서 벗어났기에 더 특별한 점심. 혼자 먹다가 혼자 놀다가 혼자 운동도 하다가 가끔 어울리기에, 그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매일이라면 그저 일상일 뿐이겠지만 가끔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이런저런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낄낄대는 게 그렇게나 즐겁다. 벌써 20여 년째, 거의 매일 하루 8시간을 보는 사이. 그저 동료라는 단어로 부르기엔 너무 가까운 사람들. 한 조직에 속한 사이니, 사전이 정의하는 식구라는 단어의 뜻에 가장 적합한 이들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앞서 말했듯, 회사 전체 직원들을 식구라는 다정한 단어로 부를 수는... 없다.


아무튼 이들과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입사 당시로 돌아가는 게 맞으리라. 내 입사와 그들의 입사가 우리 인연의 시작이니까. 무려.. 17년 전 이야기. 크흑. 입사 초 나는 마감병이라는 것을 크게 앓는 중이었다. 주간지 편집자라는 직업 특성상, 주 1회 들이닥치는 마감이 그렇게나 싫었더랬다. 월-화로 이어지는 마감, 그 스트레스 때문에 일요일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일 또 마감이야. 젠장. 그러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출근을 하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도무지 모를 월-화를 어떻게든 보내고 나면, 수요일이 찾아왔다. 우와우! 수요일. 이전 마감은 끝이 났고 다음 마감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계획과 회의가 잔잔하게 이어지는 수요일.


그런 수요일의 점심시간. 팀원이 다 같이 우르르 밥을 먹던 그 시절, 팀장은 수요일 점심 때는 늘 밥과 함께 소주나 막걸리를 시키곤 했었다. 메뉴 선정 때부터 다른 날과 달랐다. 소주냐 막걸리냐를 고민하며 더 땡기는 술을 선택하고, 주변의 의견을 묻고, 그것과 어울리는 안주로 식사를 곁들이는 느낌이랄까.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꽤나 놀랐었다.

'저 팀장님, 알코올중독자여? 왜 대낮에 술을 먹는 거지?'

심지어 내 세계엔, 찐 알코올중독자 아버지가 계셨다. 내 세계에서 대낮에 술을 찾는 건, 내 아버지 같은 중독자들이나 하는 짓이었건만. 멀쩡히 회사 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낮에 얼굴이 불콰해질 만큼 술을 찾다니. 지금이야 고기능을 수행하는 문제적 알코올 의존자들이 많다는 걸 이해하고 있지만(.... 고기능 알코올중독자로 살아본 적도 있지만), 아무튼 20대의 나는 팀장님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회사 선배들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그들의 대화 주제. 대낮에 술까지 퍼마시며 한다는 이야기가 결국 일이었다. 이 제목이 어땠고, 저 레이아웃이 어땠고...... 미친 사람들 같았다. 술자리에서도 일밖에 모드는 일 중독자들. 그들의 삶이 안쓰럽게도 보였더랬다.

그리고 17년이 흘렀다. 후훗. 역시, 인간의 앞날은 예측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함부로 남을 욕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인생의 진리 가운데 하나는 욕하면서 닮는 게 아닐까. 아무튼 지금의 나는 수요일 점심이 되면 그렇게나 술 한잔이 그립고, 한두 잔 술을 기울이며 지난 신문과 회사 사람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게 그렇게나 재밌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술자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계를 보고, 1시가 되면 탈탈 털고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사는 게 한창 힘들 땐 이들 앞에 앉아서 많이도 울었더랬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막막함과 어이없음, 억울함 그 모든 걸 토로하곤 했고, 동료 친구 식구 그 모든 단어 어딘가 즈음에 있는 이들은 우는 나를 두고 그저 먼산을 바라봤더랬다. 2년의 이혼소송이 모두 끝났던 그 가을, 그해엔 집에 김장김치가 넘쳐났었다. 시골에서 김치를 담근다는 누군가는 김치통이 무겁다며 집까지 김치를 가져다줬고, 시어머니가 김장을 했다는 누군가는 뽀오얀 위생팩에 김치를 담아와 회사에서 건넸다. 이번에는 내가, 그들을 앞에 두고 먼산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눈을 마주하면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올랐으니까. 우리 모두를 돌아본다.  입사 당시와 달라진 서로의 삶도 바라본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우리는 그 모든 순간을 바라본 사이가 되어 있었다.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잔치에 참석했다. 내 아버지의 장례식장에도 그들은 함께였다. 친구처럼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지만, 회사 동료라는 적절한 거리감이 있는 묘한 사이. 그렇지만 밥이든 술이든 언제든 먹을 수 있고, 하하호호부터 눈물 질질 대화도 모두 가능한 그런 사이. 이런 사이야말로 식구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게 아닐까.


식구=가족이던 옛 정의에 따르면, 내 세상의 진짜 식구는 단 한 명 12살짜리 꼬맹이가 전부다.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상대. 하지만 한 조직에 속해있고, 정서적 친밀함까지 주는 '확장된 식구'가 내게는 존재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날들이 조금은 더 퍽퍽하고 외롭지 않았을까. 건강 이슈로 휴직을 할 때에도 나는, 그들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저 먼산을 보며 덤덤한 가면을 쓰고 이야기를 건넸을 뿐. 이 모든 삶의 굴곡들에 이리저리 휘청이면서도 그나마 버텨서 넘어갈 수 있는 건 어쩌면 이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니 그렇다. 우리는 입을 열어 말도 하고 함께 음식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 이렇게 음식과 대화의 힘으로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게, 식구라는 단어의 진짜 뜻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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