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찾아오는 점심시간. 산책, 혼밥, 커피숍 등 이런저런 방법들로 혼자 놀기 레벨을 쌓고 있던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여름. 내가 사는 이 땅, 이곳은 '대프리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불볕 성지(?) 대구였다. 언젠가 뉴스에서 '불볕더위'를 논하며 아스팔트 위에 날계란을 톡- 하고 까봤더니 지글지글 익더라는 이야기가 설화처럼 전해져 오는 곳. 이런 곳에서 한여름 12시에 산책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위도 싫고 햇볕도 싫고 숨 막히는 대구의 이 열기는 더 싫었다. 식당을 찾아 걷기도 힘든 와중에 산책이라니.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정말 없었다.
본격 더위가 시작되기 직전, 산책을 하면서 깨달아버렸다. 아아- 더는 걸어 다닐 수 없겠구나. 대구의 여름이 시작되고 있어. 그러던 중 간판 하나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헬스장'
스스로를 이 동네 지박령이라 부를 만큼 오랫동안 한 회사를 다녔기에 회사 근처 웬만한 가게들의 위치쯤은 꿰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곳에 헬스장이 있다는 것쯤은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단지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건물이었기에 가 볼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을 뿐. 헬스란 무엇인가. 직역하면 건강. 헬스장이란 무엇인가. 건강장....? 올바른 영어 표현으로는 GYM이라고 해야 한다더라. 그게 내가 헬스장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여유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데 아니야? 어우, 돈도 없고 시간은 더 없는 내가 헬스는 무슨. 늘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운동을 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평생 올곧은 태도로 과체중의 삶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름 꾸준히 해온 운동이 실내자전거였다. 과체중에서 비만으로 넘어갈 무렵 무릎이 너무 아파 정형외과를 다녀야 했고, 그곳에서 권해준 운동이 수영과 실내자전거였다. 잘못된 자세로 무거운 몸뚱이를 놀리는 건 무릎에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수영과 실내자전거를 추천하는 이유였다. 아, 그리고 하지정맥류. 그런 진단 또한 받은 적이 있었기에,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는 어떤 운동이든 해야 했고 실내자전거를 택해 수년간 '간헐적으로' 해오고 있었다. 비만에서 과체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실내자전거 덕분이었으리라. 왜 자전거를 택했냐고? 정형외과를 다녀온 그날 저녁 TV 채널을 돌리는데 실내자전거가 나왔었다. 홈쇼핑 채널 속 날씬한 그녀들이 너무나 열심히 자전거를 돌리는 모습에 홀린 듯 주문해버렸고, 덕분에 운동이란 것을 삶 속에서 조금씩은 이어올 수 있었다. 이리 보면 그래, 지름신도 가끔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렇게나 수년간 이어온 운동을, 육아휴직- 복직 후에는 1년 넘게 딱 끊어버린 상태였다. 휴직 중에는 주로 대낮에 운동을 했고, 복직 후에는 복직 그 자체를 감당하느라 운동은 잊은 지 오래. 출근 전에는 침대가 절대로 놔주지 않았기에 집 안에 있는 자전거까지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밤에도 마찬가지. 퇴근 후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운 후에 운동을 하려 층간소음 대비 매트까지 구매했지만, 도무지 절대로 운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늘 찌뿌둥했고, 무엇보다 우울했다. 휴직 때 땀 흘리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었다. 운동 이후의 개운함. 이혼 소송, 아이 양육 등 내 세계에 온갖 일들이 펼쳐진다 해도 헉헉대며 자전거를 타는 중에는 다른 것들이 떠오르질 않았었다. 아악. 1분만 더. 헉헉. 30초만 더. 타이머만 노려보며 움직이면 끝. 뇌가 가뿐해지는 그 '아무 생각 없음'의 상태가 너무나 그리웠었다.
그래서였다. 홀린 듯 헬스장으로 들어갔던 건. 아무 생각 없음의 상태까지 떠오르자 발길이 절로 지하 1층 헬스장을 향했다. 꽤나 넓은 실내에 일단 놀랐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 중인 상황에 두 번째로 놀랐다. 지상 세계에 살던 나는 지하 세계의 부지런한 열기에 꽤 감명을 받아버렸다.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운동이 가능할까. 천천히 헬스장을 훑어보며 머릿속으로 바쁘게 계산을 했다. 회사에서 헬스장까지는 도보 5분. 점심시간 시작 전 10분 정도만 일찍 나와서 옷을 갈아입고 30분 동안 자전거를 돌리다 샤워만 휘리릭 하면 1시까지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가능할 것 같은데. 비싸려나. 시간이 허락해 준다 한들 가계가 휘청일 정도의 금액이라면 결제할 수 없으니까. 집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운동을, 단지 의지박약 때문에 헬스 등록을 하려는 건 확실히 '낭비'였으니까. 어쩌면 나는 돈으로 의지를 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저기요..."하고 직원으로 보이는 분께 말을 걸었다가 또 한 번 놀랐다. 세상에. 사람을 보는데 얼굴보다 팔뚝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처음 겪어본 일이었다. 부끄럽지만 그랬다. 남자직원분의 팔에 붙어있는 우렁찬 팔뚝. TV에서나 보던 어떤 걸 실제로 마주한 느낌이랄까? 사람 팔이 저렇게나 두꺼워질 수 있다는 게, 정말 엄청나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치 합성 같았달까. 심지어 직원분은 얼굴도 작았다. 저 작은 얼굴을 가진 사람의 팔이 뭘 어떡하면 저렇게 두꺼워지는 걸까. 헬스장에서 '건강'하게 키운 근육이니 건강한 게 맞겠지만, 헬스장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내 눈에는 그 근육이 너무나 부자연스럽게만 보였더랬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헬스장 요금이었다. 초울트라슈퍼팔뚝을 가진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헬스장은 크게 기간제와 일회성으로 요금제가 나뉘어 있었다. 기간제는 보통 3, 6, 12개월 정도의 기간을 한 번에 등록하는 것으로 등록한 그 기간 안에 몇 회든 무제한으로 방문할 수 있는 이용권이었다. 일회성 요금제는 기간제보다는 금액이 쌌다. 50회권과 100회권을 살 수 있었는데, 50회권은 6개월, 100회권은 1년의 이용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1년 동안 100회, 그 이용권이 40만 원이었다.
나는 점심시간에만 잠깐씩 운동을 할 계획이었다. 출근 전 혹은 퇴근 후 시간에 이곳에서 운동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출근 전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했고, 퇴근 후에는 아이 저녁을 챙겨야 했으니까. 회사일이 바쁜 날들을 제외하면 평일 주 2~3회 정도 점심시간에 올 수 있지 않을까. 매일 오지도 못할 상황인 내게 기간제 이용권은 무의미해 보였다. 반면 100회권은 확실히 구미가 당겼다. 주 3회를 온다고 가정했을 때, 한 달이면 12회, 10달이면 120회를 채울 수 있는 거니까. 40만 원에 100회면 1회에 4000원? 오호라- 헬스장에서 주는 옷을 입고 30분 자전거를 타고 간단히 샤워까지 할 수 있는 금액으로 4000원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제를 하지는 못했다. 여러 번 생각해 봐도 분명 합리적인 소비라고 결론은 내리게 됐지만, 나는 나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집에 자전거가 있어도 올라타지 않는 내가, 과연 헬스장에 내 발로 올까? 그게 가장 의심스러웠다. 몇몇 지인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헬스를 등록하고 점심시간에 가려고 하는데, 내가 과연 갈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게 되겠냐. 당연히 안 가지."
"그치?"
................... 쳇. 세상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지인들. 수년간 나를 지켜본 이들이 해주는 이야기였지만 조금은 속상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헬스를 등록하려는데 모두가 뜯어말리는 이런 삶이라니. 흥. 지인들의 격한 반응에 약간 오기가 생겼던 것도 같다.
나는 지인들의 충고와는 정반대로, 덜컥 헬스장에 등록해 버렸다. 계획주의자답게 헬스장 첫 등원을 앞두고는 아주아주 차분히 머리로 상상을 시작했다. 자아, 헬스장에 갈 때 무엇이 필요할까. 운동복은 헬스장에서 주는 걸 입으면 될 것 같으니 패스. 출근할 때 입은 옷을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운동 후에 샤워만 하고 다시 출근룩을 입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일정.
우선 속옷과 샤워용품들을 챙겼다. 머리를 감을 시간은 애초에 없을 것이므로 샴푸/린스는 챙기지도 않았다. 땀을 흘린 후 머리를 감지 않으면 아주아주 찝찝하겠지만, 몇 시간 참다가 퇴근 후 집에서 제대로 씻으면 해결될 것 같았다. 화장품도 챙겼다. 운동 시작 전 클렌징이 필요할 테니 클렌징 워터와 샤워 후 바를 기초화장품부터 BB크림까지, 몇 번이나 훑어보며 가방을 챙겼다.
대망의 첫 헬스날. 나는 출근을 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챙겨 들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두근두근. 11시 50분 즈음 사무실에서 나와 헬스장 도착. 옷을 갈아입고 30분 자전거를 타고 헉헉 거리며 샤워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1시였다. 빠듯했지만 바쁘게만 움직인다면 가능한 점심시간 운동. 그때부터 주 2~3회, 점심시간을 이용해 헬스장에 갔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옷을 갈아입고 씻는 시간이 짧아졌다. 한두 달 헬스를 하는 날들이 쌓여가자, 가끔 마주치던 60대가량의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진지하게 묻기도 했었다.
"매번 왜 이렇게 후다닥 씻고 가요?"
너무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나 역시 진지하게 답변을 해드리고 싶었다.
"아.. 회사 점심시간에 잠깐 나온 거라서 점심시간 전에 돌아가야 해서요."
이후 어떤 대화가 이어졌더라. 열심히 사네, 왜 점심에 오냐, 퇴근하곤 뭐 하냐 등의 대화였던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헬스장에 간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 역시 비슷하긴 했었다. 열심히 사네. 대단하네. 그렇게까지 운동하는 이유가 뭐냐. 등등. 글쎄. 이렇게까지 허덕대며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스스로에게도 여러 번 물었었다.
올해로 헬스 등록 3년 차가 됐다. 아, 1년에 100회를 다 채우지 못한 것부터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아이의 방학 때는 숱하게 연차를 냈으니 점심시간을 누릴 수 없었고, 운동이 하기 싫어서 동료와 밥을 먹은 적도 많았다. 그러니 어떤 마법 같은 변화가 몸에 일어나지도 않았다. 처음 운동을 시작하고는 체중감량 같은 기적적인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었지만 웬 걸. 고작 이따위 운동량으로는 수년간 쌓아온 이 튼튼한 지방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365일 중 100회도 채워내지 못하는 운동임에도 꾸준히 돈을 쓰고 있다. 이유는? 굳이 설명하자면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드는 내가 좋았다. 오로지 나를 위해 몸을 움직이며 내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 '나는 지금 나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실체감이 좋았다. '에라이, 나 따위' 하면서 살다가 '이런 나라도 아껴줘야지'하는 마음이 땀을 흘리다 보면 절로 들었다. 때론 쌍욕을 하면서 페달을 밟기도 했다. 이혼소송은 지지부진 이어졌고 '으아아아아아, 달아나버릴 테다'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미친 듯 페달을 밟는 날들도 있었다. 딴에는 하늘로 날아갈지도 모를 정도의 세기였으나 웬 걸. 고작 이 정도 힘으로는 단단히 붙어있는 실내 자전거를 날아오르게 할 수 없었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몸을 움직이면서 '으아아아아아아' 하다 보면 희한하게도 힘이 났다. 힘을 쓰면서도 힘이 나는 신기한 기분. 그 기분이 좋아서 운동을 '간헐적으로' 이어간다.
아,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이유. 운동 끝에 '어이구 기특하다'하고 나를 다독일 수 있는 게 좋다. 이런저런 일들이 내 세상에 펼쳐져도 기어이 출근을 하고 운동까지 해내는 내가 가끔은 너무나 기특하고, 그 기특한 스스로를 칭찬해 줄 수 있다는 것. 그게 40만 원짜리 지출을 지금도 이어나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