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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May 03. 2024

우울을 잠재우는 방법

걷고 또 걸으며 우울과 멀어지기

서래섬, 2019 / Fujifilm X-Pro2 + XF 35mm F2 R WR

  부모님은 나의 독립을 반대하셨다. 결혼 전에는 꿈도 꾸지 말라며 아예 못을 박고는 독립의 ㄷ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셨다. 부모님이 그렇게 소원하던 결혼을 한 지 5개월 만에 나는 도망치듯 본가로 돌아왔고, 지지부진하게 3개월을 흘려보낸 뒤에야 극적으로 협의이혼을 할 수 있었다.

결혼 한 번으로는 성에 안 차셨는지, 이혼을 한 지 1년이 채 안된 시점에 부모님은 또다시 결혼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그런 부모님을 피해 서른의 중반에 다다라서야 진짜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사당동이었다. 회사까지 직행하는 셔틀버스가 있었고 거리도 멀지 않아 선택한 곳이었다. 역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신축빌라에 분리형 원룸이라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반지하이긴 해도 낮에는 커튼을 쳐야 할 정도로 눈이 부신 채광 덕분에 서둘러 계약을 했다.


  한 두 달간은 정말 신이 났다. 온전한 나의 공간이 생긴 것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것에 진정한 자유를 맛보았던 시간이었다. 그 작디작은 다섯 평 반지하 원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를 열었다. 한 구짜리 인덕션도 아닌 하이라이트가 있는, 주방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도 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 친구들 모두 독립을 축하하며 내 공간을 찾아준 덕에 혼자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었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불쑥불쑥 외롭다는 생각과 근원이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서 올라오는 뾰족한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계절 탓을 하며 넘기기에는 감정의 깊이가 너무 깊었다. 음악을 듣다가도 울고, 책을 읽다가도 울고, 드라마를 보다가도 울었다. 다시 사춘기 소녀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음을 추스를 수 없을 때에는 꾹꾹 눌러 담아보려 노력하기도 전에 감정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내가 우울하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친구는 내가 나를 너무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씩씩하고 용감하게 인생을 헤쳐나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저 현실을 회피하기 급급해 도망 다니기 바빴던 것이었다.

  그 친구는 집 밖으로 나가 걷기를 권유했다. 그러면서 내가 우울하지 않은 이유를 리스트로 만들어줬다.


  처음에는 집 주변을 가볍게 산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난생처음 살아보는 동네여서 길을 익히기 위함도 있었다. 사당동은 1년 365일 차와 사람으로 복잡한 곳이었지만, 내가 살던 곳은 놀랍도록 한적했다. 그 덕분인지 구석구석 동네를 걷고 있으면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마음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지도를 보듯 동네가 훤해질 무렵에는 가벼운 산책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던 과거와 달리 체력도 좋아져 조금 더 멀리, 오래 걷고 싶어졌다.

  퇴근 후에 늘 다니던 동네를 벗어나 현충원까지 걸어갔던 날이었다. 지나가다가 ‘한강공원’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홀린 듯이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동작역으로 이어지는 출구를 나가 한참을 걸어서야 겨우 한강에 다다랐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래 가며 도착한 잠원 한강공원은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현란한 불빛, 그리고 넘쳐나는 사람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가뜩이나 혼란한 마음에 소란까지 더할 일은 아니었다. 그때 조용한 곳을 찾아 다시 되돌아오며 외딴섬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발견했다. 섬은 참을 수 없지. 입구에서 낚시를 즐기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던 그곳은 ‘서래섬‘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메밀꽃이 만개한 서래섬은 마치 이른 눈이 내려 소복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번뜩 낯선 느낌에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한강과 그 위를 수놓은 도시의 불빛, 그리고 고요한 공기는 내 생각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복잡한 생각은 그만두고 어서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라고, 예쁘지 않냐고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그 거리를 매일 2시간씩 왕복했다. 10km가 넘게 걷는 날도 왕왕 있었다. 서래섬의 벤치에 앉아 한없이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타는 노을을 구경하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여전히 외로움은 종종 찾아왔지만, 더 이상 작은 일에 울지 않을 만큼 자라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걷고 또 걸으며 나는 우울과 멀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우울한 감정과 이별을 한 것은 아니다. 나의 디폴트 값은 우울이었으므로, 늘 밝은 척 나를 포장했다고 말하는 것이 이제는 부끄럽지 않다.

여전히 어느 날은 우울한 감정에 붙잡혀 무기력에 빠지기도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나의 감정을 수용하고 나니 예전처럼 우울의 늪을 빠져나오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그런 날에는 이불속에 폭 싸여 누워있다가 조금의 힘이 생기면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또 숲으로 나선다. 이불 대신 내리쬐는 햇살과, 바람과, 풀의 향기에 둘러싸여 한껏 에너지를 충전하고 나면 마음속 깊은 번민도 빈 껍데기가 된다.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가올 내일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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