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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앨리스 Apr 26. 2024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그곳에 머물러

나의 메이트 J에 대하여

오키나와 온나손의 에어비앤비에서, 2017 / Contax T2 & Film scan

  나의 메이트 J를 이야기하려면 여행이 빠질 수 없다. 우리의 첫 만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와는 정말 우연히 만났다. 아무 이유 없이 떠나고 싶어 제주행을 택했던 2014년의 어느 가을이었다. 경비 절약을 이유로 제주 동쪽에 위치한 이름도 귀여운 ‘코코코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게 되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도미토리룸을 같이 사용하게 된 그녀와 나는 첫 만남부터 말이 잘 통해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집이 가까웠던 우리는 서울에 돌아와서도 자주 만났다. 바람을 쐬러 강원도로 가거나, 추억을 곱씹으며 또다시 제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취향도 여행 스타일도 참 잘 맞아서 J와 함께라면 늘 마음이 편했다. 우리가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나보다 키가 훌쩍 크고 마른 체격인데 나는 작고 통통하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타고 나는 더위를 많이 탄다는 것 정도다.


  그런 우리가 어느 겨울 떠났던 여행에서의 에피소드도 들려주고 싶다. 그때의 목적지도 역시 강원도, 인제 자작나무숲을 향해 갈 때였다. 운전은 내 담당이었는데 가던 도중 배가 고파져 식사를 하기로 했다. 첩첩산중 인적 없는 산골 마을의 거리를 달리다 식당 간판을 발견하고는 차를 돌렸다. 하지만 식당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배고픔에 눈이 쌓인 길을 보지 못한 나의 하얀 붕붕카는 앞바퀴가 눈 속에 파묻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 겨울이었음에도 다급한 마음에 카디건 하나만 걸친 채 맨 손으로 눈을 파내고 있는 나를 J는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의 추위에도 곧잘 감기에 걸리는 그녀에게는 신기한 광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긴급 출동 서비스를 신청한 후에야 우리는 눈밭을 겨우 탈출할 수 있었고, 그 일은 우리 사이에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2017년의 봄, 우리는 오키나와로 떠났다. 수없이 함께 여행을 다녔지만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3박 4일의 일정이었지만, 늦은 저녁 나하공항에 도착했고 마지막 날은 일찍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라 여행을 할 수 있는 기간은 단 이틀뿐이었다. 첫날 공항 근처의 에어비앤비에 짐을 풀고 동네의 작은 이자카야에 들러 꼬치구이로 저녁 식사를 했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는 동안 제주에서 시작해서 오키나와까지 함께 오다니, 같은 이야기를 하며 J와 나는 우리의 인연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다음 날, 자동차를 렌트하여 오키나와 남부로 향했다. J가 오키나와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오션뷰 카페인 '하마베노차야'와 '미바루 비치'를 꼽았다. 대기줄이 꽤 길다는 소문에도 운이 좋게 남은 한 자리는 우리의 차지였다.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불어오던 선선한 바람과 하와이풍의 음악이 여유로움을 더해주었다.

  잠깐의 유유자적을 즐기고 미바루 비치로 이동할 때였다. 5월 5일은 일본도 어린이날이라 좁은 골목을 따라 위치한 모든 주차장이 만차였다. 다른 주차장을 찾아 헤매다가 점점 미바루비치와는 멀어지고 있었다. 이미 목적지 안내를 종료한 내비게이션은 잠시 쉬게 하고, 바다 쪽을 향해 달리던 중 외딴곳에 다다랐다. 정글 같은 숲을 지나니 비밀스럽게 해변이 나타났는데, 그 풍경이 너무 멋져 한동안 넋을 잃고 감탄만 했던 것 같다. 그곳의 명칭은 햐쿠나 비치. 관광객이 넘치는 미바루 비치와는 달리 현지인들만 아는 숨겨진 장소라고 했다. 우연히 발견하는 여행의 묘미, 그것을 즐기기에 너무나도 완벽한 장소에서 직접 만든 돗자리를 펼쳐 놓고 J와 나는 하염없이 바다를 즐겼다.

 

 두 번째 숙소에서는 예기치 못한 난관을 마주했다. 5월의 오키나와는 이미 한여름의 날씨였고, 에어컨 실외기가 고장 나 뜨거운 바람만 내뿜고 있었다. 휴일이라 그런지 호스트와는 연결이 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천장의 실링팬에 의존하여 겨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찬물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서 늦은 점심은 이페코페라는 작은 베이커리에서 사 온 천연효모식빵과 편의점표 컵스프로 대신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좋았던 기억이다. 발코니로 들어오던 햇살이 예뻤고, J와의 오키나와 추억을 필름에 담았다. 비록 초점은 저 멀리 가서 맞았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좋아하는 사진이 되었다. 그날 저녁 난생처음 먹어보았던 온면 소키소바도, 소화를 시킬 겸 산책했던 타이거 비치에서 만났던 노을도, 그리고 그다음 날의 츄라우미 수족관도 모두 추억이 되어 고이고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J와도 잠시 멀어졌던 적이 있다. 감정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엄마가 되며 물리적인 거리와 육아로 여유가 없던 이유가 더 컸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며 시간적 여유가 조금 생긴 뒤에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주 잠깐의 콧바람이지만, 몇 년 만에 만나도 여전히 이야깃거리가 넘치고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메이트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생일 기념으로 J와 부암동 나들이를 갔었다. 생일이 3일 차이라 오랜만에 선물도 교환했는데, 선물을 열어보며 문득 우리는 서로를 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함께 할 때도, 함께 하지 않을 때도, 우리는 차곡차곡 시간과 추억을 쌓으며 언제나 여행하던 그 시절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J와 그라운드시소 성수에서 전시회를 관람하며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굳이 멀리 가지 않는 잠깐의 만남에도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 신기하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무한한 긍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30대를 지나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다를지언정, 잘 될 때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힘들 때는 누구보다 아파하며 서로의 다정함을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녀와 우정을 다지며 20년쯤 후에는 공동 환갑 파티를 해야겠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꽤나 사랑스러운 할머니들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꼭 그렇게 늙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조만간 J에게 이야기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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